/현경숙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로 한국 보수 세력이나 이념이 몰락을 맞았다는 분석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박 대통령이 보수 진영의 간판이었다는 점에서 그런 관측과 표현이 전혀 수긍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하거나 적절한 지적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보수 진영의 한 부분이지 전체라고 볼 수 없는 데다, 이번 사태는 박 대통령과 최 씨 세력의 부정과 불법에서 비롯된 것이지 보수 진영 전체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 이념을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존 사회 질서의 유지와 안정을 바라는 정치 성향을 보수라고 한다면, 박 대통령의 과오와 상관없이 보수는 여전히 건재하리라 본다.

  박 대통령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도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이다.

박 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신화'의 종언을 예언하는 정치인과 학자들이 등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18년 집권 기간에 한국은 산업화에 성공했다.

한국의 운명이 달라졌다고 할 만큼 대단한 성공이었다.

다만 이 성공이 전적으로 박 전 대통령에 의해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산업화의 역군이었던 노동자들의 피땀과 대기업 및 수출 위주 경제를 받아들인 국민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대한민국이 함께 뛰었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은 실현됐다.

또 국제 정치·경제 질서를 주도했던 미국이 한국 상품을 사주고, 경제 개발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이 이끌었던 세계 질서에 편입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해도 한국은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인권 탄압과 민주주의 유린은 박 전 대통령의 큰 과오였다.

산업화를 온전히 박 전 대통령만의 업적으로 간주하고, 그의 독재 이력을 지워버리는 것이 '박정희 신화'라면 박근혜 대통령의 위헌·위법 행위는 그 신화를 깨뜨리는 쇠망치가 될 게 틀림없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 및 과오와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은 별개다.

아버지와 딸의 정치적 공과는 모두 별도로 다뤄져야 정당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을 딸로 뒀다고 해서 과대 평가돼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소 평가된다면 부당하다.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을 최순실 게이트의 공동정범 내지 주범으로 지목했다.

최 씨의 광범위한 국정 농단을 박 대통령이 묵인 혹은 방조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비선 실세의 발호를 내버려뒀을 뿐 아니라, 본인은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청와대 내 거주 공간인 관저에 머물며 업무 공간인 본관 집무실에 출퇴근하지 않은 날이 많았다.

세월호 참사 당일 그가 관저에 머문 것도 본관 집무실로 출퇴근하지 않는 평소 행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박 대통령이 본관 집무실에서 정상 근무했더라면 컨트롤타워 부재 논란이 이처럼 끈질기게 제기되진 않을 터다.

  해외에는 우리나라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같은 경내에 있는 공관이 많다.

대사가 공식 일정이 없다고 해서 관저에 머물며 전화나 서면 보고만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대사가 심하게 아파 몸져눕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의 미용시술 의혹이 어지럽게 제기됐다.

세월호 사고 당일 박 대통령은 오후 3시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을 지시했는데 실제 방문한 시각은 오후 5시 15분이었다.

그동안 머리 손질 등 준비를 했다고 한다.

  국민은 수백 명의 목숨이 걸린, 긴박했던 '세월호 7시간'에 박 대통령이 본관으로 나가지 않고 관저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그가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이런 업무 행태는 분노를 일으킨다.

앞으로 여성 대통령은 뽑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심지어 야당의 대표적 지도자들조차 그런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우리 딸들의 미래를 망쳐놓았다는 원망도 있다.

  여기에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박 대통령은 여성이지만 그의 잘못이 다른 여성들의 허물이 돼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조직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마다치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우리 사회는 이 땅의 여성 지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를 바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앞으로 박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다시 등장해서는 안 되겠으나, 여전히 여성들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사회는 그것이 가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번 사태로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퇴보해서는 안 된다.

  촛불 집회에서 '재벌 구속'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재벌 기업들이 불법을 저질렀다면 응당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

재벌은 막강한 자본을 가진 기업 집단이다.

한국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한 축이자, 경제 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졌다고 해서 대기업 집단의 긍정적 역할까지 부인해서는 곤란하다.

  이번 사태로 보수의 한 축이 허물어졌다.

그것은 썩은 보수이지 합리적이고 건전한 보수가 아니었다.

보수 진영이 나라를 이끈다고 자처하려면 그 원인을 진단하고 고치려 노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보수 전체, 여성 지도자 전부, 선의의 대기업들이 모두 부인돼서는 안 된다.

부정과 반칙, 불법이 있다면 가려내 처벌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과 제도가 있으면 고치는 것이 숙제다.

지금이 보수의 위기인 것은 맞지만 종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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