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가지 사연담은 그곳에서 일상의 특별함을 보았다

어느새 2년이 됐다.

2015년 3월 첫 회가 나간 이후 당초 목표인 100회를 채웠다.

계절이 여덟 번 바뀌면서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신전라박물지 시작은 최승범 교수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란 말과 함께 신문 연재를 부탁했다.

프랑스 르느와르 박물지처럼 전북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싶었다.

이왕 시작하는 것, 시 뿐 아니라 사진과 글도 함께 넣자고 역제안했다.

최 교수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이렇게 신전라박물지는 시작됐다.

산민 이용 선생으로부터 ‘신전라박물지’ 한문 제호도 받았다.

기세당당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고난의 길이란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소 물색은 최 교수의 몫이었다.

하지만 연재가 계속될수록 장소 물색은 점점 힘들어졌다.

최 교수의 나이를 감안해 산악 지역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길이 다소 완만한 완주군 화암사를 찾을 때도 내려오는 길에 넘어져 하마터면 불상사가 날 뻔 한 일도 있었다.

평지에 있어야 되며, 자동차에서 근접한 장소야 했다.

또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는 지극히 제한된 장소만 접근이 가능했다.

이러다보니 당초 계획과는 달리 장소 섭외가 매우 힘들게 됐다.

또 전주에서 다소 거리가 먼 남원이나 무주를 찾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전북 방방 곳곳을 찾아보자는 계획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매주 일요일 4시간 가량이었다.

하지만 원고를 탈고하고 탐방 지역을 물색하다보면 실제 주어진 시간은 약 2시간이다.

이 시간 안에 무주나 남원 지역을 방문하는 것은 무리였다.

원로인 최승범 교수와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한평생 글쓰기에만 몰두한 최 교수에겐 요령이란 게 없었다.

신문사 창간이나 명절 특집이 발행될 땐 신전라박물지는 쉬어야 했다.

최 교수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신문사 사정을 이해하지도 않았다.

‘연재는 약속이다’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넋 나간 표정을 지으면 ‘최씨 고집 몰라’라며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미리 취재를 한 탓에 원고 걱정은 없었다.

2~3주 연락을 하지 않다 계면쩍은 얼굴로 찾으면 ‘다시 시작해야지’라며 팔을 벌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신발끈을 동여매기도 했다.

낮선 곳을 가면 항상 그 지역 특색 음식을 찾았다.

순창에선 다슬기탕을, 모악산 밑에선 유명한 된장국집을 들렸다.

식당 주인들의 푸짐한 인심도 느낄 수 있고, 동네 사람들의 사람 사는 냄새도 물씬 느꼈다.

하지만 인적이 없는 산골을 찾을 때엔 식당이 없어 점심을 거르기도 했다.

함께 하다 보니 부자지간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우연히 만난 지인들도 최 교수를 아버지로 여겼다.

애써 부인하지 않았다.

비록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지만 우린 식구였다.

매주 일요일, 음식을 함께 먹는 식구(食口)인 것이다.

100회를 마친 후에도 일요일 아침엔 고하문학관을 가기 위해 습관처럼 눈이 떠진다.

다시 눈을 감고 늦잠을 요청할라 치면 어김없이 전화가 울린다.

최 교수다.

‘점심 함께 해야지’란 말에 다시 고하문학관을 찾는다.

2년 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며 두 남자가 오늘도 수다를 떤다.

평범한 것부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까지 가지 않은 곳이 없다.

전북의 옛 역사와 의미를 상기시켰고, 새로움이 한 편의 시로 전달됐다.

주변 모든 것이 관심사로 인식됐고, 우리 고장 전북에 대한 인식이 변화됐다.

주변을 다시 한 번 인식하는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신전라박물지와 같은 작업을 또 다시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다시 주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소소한 일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 정도면 멋진 작업 아닌가.

/조석창기자  

▲ 나바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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