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박근혜 정권에 일어난 사건중심 비참하고 모욕적인 사회를 새롭게 규정

정희진 <낯선 시선>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어떤 위치를 가질까.

또 자신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스스로는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육아는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직장인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에서 따가운 눈총과 압박감을 견뎌내야 한다.

대중교통의 ‘임산부 배려석’처럼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에 ‘배려’라는 이름이 붙는다.

여성 정치인이 주장을 많이 하면 나댄다는 말을 듣기 쉽지만, 남성 정치인은 지적이고 유능하다고 평가받는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제대로 말할 수 없다.

남성의 언어로는 여성의 경험을 표현할 수 없다.

남성의 언어에서 스토킹은 구애의 과정일 뿐이고, 데이트 폭력과 부부 강간은 사랑싸움이 된다.

정희진의 <낯선 시선>(교양인)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에 일어난,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주된 사건들을 ‘여성’의 눈으로 재해석해 쓴 글들을 고르고 모아 엮은 책이다.

저자는 강자가 약자를 통제하기 위해 쓰는 이중 잣대, 남성 언어의 이중 메시지에 주목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속성을 그만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이 비참하고도 모욕적인 사회를 ‘여성’의 언어로 새롭게 규정한다.

인식의 틀이자 사유의 수단으로서 언어는 곧 권력이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뻔뻔한 사람들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죄의식과 불편함 없이 욕망과 자기도취를 엔진 삼아 자신의 성공을 위해 돌진하는 사람들. 돈과 힘을 숭배하고 약자를 짓밟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 뻔뻔함이 곧 쿨함, 강함으로 평가받으며 우리 시대의 규범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약자의 무기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내부의 소수자성을 발견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당당하게 분노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는 것이다.

머리말을 통해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이 여성주의를 설득하고 설명하고 주장하는 입장, ‘여성주의 의식화’가 아니라고 밝힌다.

책은 인간의 사회화 그리고 인식 과정에서, 젠더와 여성주의의 ‘중대한 역할’을 강조하는 데 있다.

책에 소개된 한 사례를 보자.

얼마 전 어느 단체에서 주최하는 ‘인문학 캠프’에 강의를 갔다.

한눈에 봐도 똑똑해 보이는 여학생이 강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질문이 있다며 손을 들었다.

“저는 페미니즘은 인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인문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건데, 페미니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면서 갈등을 만들잖아요? 여성주의가 인문학이 되려면, 앞으로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아직 여성주의는 인문학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강의하지 말고 나가라는 투로 들렸지만 나는 기분 좋게 응답했다.

“아, 그렇군요. 저는 인문학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 가는 공부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누구인지 고민할 때, 자신의 성별(性別)을 모르고 가능할까요? 여성주의는 성별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해 인간과 사회를 공부합니다. 아, 참 그리고, 이게 가장 잘못 알려진 건데요.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여성주의가 아니라 가부장제입니다.”

그 여학생의 의견은 내가 25년 동안 들어 왔지만 늘 친절하게 대답해야 하는 통념이다.

여성주의는 여성 문제만 다루지만(혹은 다루어야 하지만), 인문학이나 다른 학문은 인간을 다룬다는 이야기다.

사회적 약자가 자기 언어를 갖지 않으면 존재 양식을 잃는 시대다.

절대 다수인 사회적 약자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윤리와 언어뿐이다.

단언컨대, 여성주의를 모르고 앎을 말할 수 없다.

인류의 반의 경험을 제외하고, 어떻게 인간과 사회를 논할 수 있을까.

/윤가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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