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섭 현 군산고 교장, 수필가, 칼럼니스트

잘 나가던 위나라가 서쪽의 신흥국가인 진나라에게 밀리고 말았다.

진나라는 훗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그 진나라다.

위나라는 수도를 ‘대량’으로 천도했다.

말이 천도지 쫓겨난 것이다.

나라의 이름도 梁으로 바뀌었다.

굴욕적인 일이다.

천하의 패자에서 밀려난 양나라 혜왕은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맹자를 초빙하였다.

첫 만남에서 마음 다급한 양혜왕은 “망해가는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강병부국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맹자는 양혜왕에게 사자후를 날렸다.

“망해가는 나라를 일으키겠다면서, 지금 무슨 강병부국을 말하십니까? 仁義를 말해야지!”(박경덕 <나를 위한 맹자 인문학> p. 21-22)요지는 간단하다.

망해 버린 나라를 어떻게 해야 다시 굳건하게 세울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아주 간결하면서도 단호했다.

‘인의(仁義)’를 말해야지 무슨 뚱딴지 같이 강병부국을 애기하냐는 것이었다.

당대의 고매한 스승 맹자를 모시고 탁월한 해결책을 얻고자 했던 양혜왕의 입장에서 보면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깊이 있게 통찰해 보면 이것처럼 정곡(正鵠)을 찌른 대답이 또 있을까.인의(仁義)에 대하여 맹자처럼 철학적으로 풀어갈 자신은 없지만, 쉽게 설명하면 그것은 ‘어짐가 의로움’이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인(仁)이요. 옳고 당당한 것을 따르는 것이 의(義) 아니겠는가. 사람 사는 곳의 기본 상식이면서 국가 통치의 근본 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맹자께서 설파하신 이 인의(仁義)는 선비들의 학문수양과 정치가들의 경세치용의 화두(話頭)로 이어져 온 것이다.

맹자와 양혜왕의 문답은 최근 실타래처럼 꼬인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에도 잘 어울리는 예화다.

국정 마비와 국민 분열을 초래한 대통령과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으로 야기된 대통령의 파면과 구속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서 맹자의 말씀 인의(仁義)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운영해 온 사람들은 다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겠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양혜왕에 대한 맹자의 꾸지람을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돌아볼 일이 어찌 한두 가지겠는가마는 대통령이 ‘찌라시’수준의 억측이라고 몰아붙일 때 단 한 사람의 참모만이라도 그 인의(仁義)를 당당하게 지적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오늘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사람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날까. 그 이유는 자신만의 거울로 보고 싶은 곳만 가려서 보는 편협함 때문일 테지만, 누구보다도 잘 배우고 누구보다도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분들이라서 더 놀랐다.

어찌 보면 맹자의 인의(仁義)마저도 보편성을 띤 진리로서 세상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책갈피 속에만 헌법의 정의(正義)가 보편적 가치로 자리하고 있을 뿐, 현실에서는 자신의 이해에 따라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한쪽에서 ‘이게 나라냐’고 울분을 토해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마치 ‘그런 것이 나라야'라고 대꾸하는 것 같아서 그 어디쯤에서 ‘인의(仁義)’를 들먹거려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탄핵과 구속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인의(仁義)의 보편성은 도도한 물결이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오월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 즉 '장미대선'을 앞두고 여전이 정국은 요동치고 있다.

후보들은 자신의 정책을 내 걸고 국민의 선택을 기다려야 함에도 상대방을 악의적으로 물어 뜯는 일에 정신이 없는 것 같다.

연일 쏟아지는 수준 낮은 네거티브를 보면서 걱정이 앞선다.

시정잡배들 수준의 거친 막말이 쏟아지고 억지가 횡행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그들에게 인의(仁義)의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더 가관인 것은 국정 혼란을 일으킨 세력들이 자신들의 잘못과 책임을 고백하기도 전에 다시 권력을 갖겠다는 몸부림은 인의(仁義)에 앞서 강병부국을 이야기한 양혜왕을 보는 것 같아 개운치가 않다.

만약 맹자께서 살아계신다면 그들에게 어떤 꾸지람을 할까를 생각해 본다.

대선에 출마한 후보자들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인의(仁義)에 대한 철학을 깊이 있게 확인해 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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