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나는 지난 일년간 우리 영화를 지켜보면서 하고 싶었던 몇 가지 얘기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한국영화 2002(1)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나는 지난
일년간 우리 영화를 지켜보면서 하고 싶었던 몇 가지 얘기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오늘은 지난 봄 동시에
개봉관에 걸렸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과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에 관한 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관객을 의식한 것으로 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이 관객동원에 실패한 반면 독립영화의 계보에서 탄생한 ‘집으로…’는 폭발적인 찬사를 받았다. 사실
‘집으로…’는 메이저영화사의 지원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독립영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 자체가 영화의 상업적 전략일 것이다. 아무튼 한국영화
현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 현상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영화의 이해’를 수강하는
학생들이 강의시간에 다하지 못한 얘기들을 이메일로 보내곤 하는데,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는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감상과 평을 보낸 것이었다. 그
글의 내용은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고, 다시는 그런 비정한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화가 호응을 받지 못한 한국 대중적 정서의
한 단면을 그 메일에서 읽을 수 있었다. 분명 이 영화는 상쾌한 영화는 아니다. 장기이식과 불법매매,
딸의 의미없는 죽음 그리고 아버지의 잔인한 복수 등등. 그런 면이 우리 사회현실의 한 단면이고 또 평범한 인간도 한이 맺히면 잔인해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폭력을 ‘표현적’ 극단으로 끌고 간 것은 이 영화의 미덕이면서 바로 그 부분이 많은 관객이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이 영화를 그나마 따뜻한 정서로 이끄는
부분은 청각장애자의 등장이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소리를 대신하는 느린 화면이 등장할 때 영화는 지속적인
폭력에서 가끔 벗어난다. 여기서 우리는 컬트적 폭력영화의 목록을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컬트 매니아들을 열광시켰던 ‘와일드
번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 등등. 

폭력의 가학성과 분출하는 피의 양으로 따지면
‘복수는 나의 것’은 그들의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관객에게 전달되는 불쾌감은 훨씬 크다. 이유는
단순하다. 열거한 컬트적 폭력영화에는 사회적 현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고 있다해도 지극히 은유적으로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의 실패원인을(상업적인 면에서) 사실주의와 표현주의 만남에서 찾는다. 현재 한국사회의 언더그라운드
현실 즉 포장되고 은폐돼 있지만, 늘 우리를 위협하는 처절한 어두움을 보여주고 관객인 우리는 동화된다.  

‘집으로…’는 여러 면에서 ‘복수는 나의 것’ 저편에 있다. 도시 소년과 시골 할머니의 우정이라는 독립영화적 주제,  다큐영화에서 빌려온
흑백 톤의 단순함, 절제된 감정, 감동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휴머니즘의 정서. 

‘집으로…’의 상업적 성공은 그런 의미에서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영화들에 빚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의 주요 관객층인 20대는 근본적으로
‘영웅본색’세대다. 그들은 성장기에서부터 폭력을 지치도록 감상했고 ‘복수는 나의 것’은 그 절정에 있다. 2002년 그들은 휴머니즘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비열한 거리를 떠나 사람 냄새나는 할머니의 품으로.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시점에 개봉되었다는 것. 그 우연은 ‘집으로…’에게는 정말 행운이었다. 전기순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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