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주 전주문화재단 생활문화팀장  

17세기에 유행어가 있었다.

지극한 경지를 칭찬할 때 이렇게 말했다.

‘송경운의 비파 솜씨 같구나’는 이야기는 이기발이 쓴 「송경운전」에 전해져 온다.

송경운은 9살에 비파를 배우기 시작해서, 열두 살에 이름을 날렸다.

사대부의 각종 연회에 불려 다녔는데, 신기에 가까운 기교가 있어서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

서울에서 인기가 많았던 송경운이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해서 전주에 살았다.

평소 비파 소리를 접하기 힘들었던 전주 사람들은 서울에서 비파 악사가 내려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집에 몰려들었다.

집이 늘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가마를 메는 천한 사람일지라도 일을 멈추고 비파를 연주했다.

이들이 실컷 음악을 감상한 후에 비파를 내려놓았고 반드시 노래의 법도를 갖추어 비파를 탔다.

이러한 삶을 20여 년간 지속한 송경운은 전주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음악을 연주했을까? 송경운 자신은 옛 노래를 좋아했지만 “음악이란 사람을 기쁘게 함을 위주로 하는데, 음악을 듣고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사람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을까?”하면서 금조, 즉 유행하는 노래를 섞어 연주해 평범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구사하려고 노력했다.

73세에 타계하기까지 수십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고 전해진다.

송경운 명인은 당시 전주의 어디쯤에서 살았을까? 이기발이 전주의 서쪽에 있던 빙치, 우리말로 하면 얼음언덕에서 전주성 내에 복사꽃과 오얏꽃이 가득 핀 풍경을 감상하다 송경운을 만난 장면을 묘사한다.

조선시대 전주에도 다가산 아래 얼음을 보관하던 빙고장이 있었다.

그래서 빙치는 다가산 부근으로 추측이 된다.

송경운은 전주성의 서쪽에 살았다.

지금의 서문 부근에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부근에 뜬금없이 기타학원, 악기점이 있다.

앞에서 수십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고 했는데 뜬금없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내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 근거가 있는 사실이냐고 물어보면 이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하곤 한다.

송경운이 활동하던 당시 전주 풍경은 어땠을까? 이기발의 기록에 의하면 전주는 큰 도회지여서 인물이 동방에 으뜸이지만 백성들이 화려함을 숭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송경운이 이사를 온 이후로 비파 소리를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예술가 한 사람의 위대한 힘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어서, 완산의 옛 풍속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계를 하면서 서로 협동하고 재물을 모아서 서로 돕는 일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기발의 「송경운전」이 없었다면 누가 그의 존재와 당시 전주의 풍경을 알 수 있었을까?전주문화재단은 올 여름 마을술사 양성 컨설팅사업을 시작한다.

마을술사(述士)란 무엇인가? 마을술사는 마을의 이야기를 관광객 등 다양한 수요층에게 해설할 수 있는 마을 이야기 선비를 뜻하는 신조어다.

공동체의 기억과 문화유산을 점·선·면으로 발굴, 연결, 확장해 마을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고 관광자원화하는 사업이다.

이를 위해 마을주민을 대상으로 한 마을이야기 만들기, 말하기, 보여주기 교육과정과 초등학교 연계 교육과정, 지역 고유의 문화와 건축유산 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인 에코뮤지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전주문화재단은 올 첫 대상지로 많은 문화자원을 보유한 완산동에서 사업을 시작한다.

완산동 주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