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上帝)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聖壽無疆) 하사/ 해옥주(海屋籌)를 산(山)같이 쌓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떨치사/ 오천만세(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 일신(日新)케 하소서/ 상제(上帝)는 우리 황제(皇帝)를 도우소서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사/ 만수무강하사/ 큰 수명의 수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기쁨과 즐거움이/ 날로 새롭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1901년 9월 7일. 이날은 고종의 50회 생일(만수성절)이었다.

경운궁에는 대소신료와 조선 주재 해외 공관원, 귀빈들이 총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독일인 프란츠 폰 에케르트가 이끄는 조선군악대는 서양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감동적인 연주를 선사해 찬사를 받았다.

이날 연주회에서 처음 듣는 곡조가 울려 퍼졌다.

군악대의 선율에 맞춰 조선인 중창단이 위의 가사로 된 노래를 시작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였다.

이날 탄신축하연에 참석한 충정공 민영환은 애국가를 전국에 알리도록 지시했고, 1902년 1월 27일 자 관보에 이러한 내용이 실렸다.

이 노래는 그해 8월 15일 대한제국 애국가로 공식 지정됐다.

대한제국은 악보를 인쇄하여 50여 개국에 보내기도 했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출범했다.

대한제국은 국민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드러내 보이기 위해 국가를 제정하기로 했다.

고종은 국가를 만들 것을 민영환에게 지시했다.

민영환은 자신이 가사를 짓고, 군악대 교사로 초빙되어 내한해 있던 에케르트에게 작곡을 맡겼다.

에케르트는 궁중 아악과 민간 음악을 들으며 조선의 음계를 연구하고, 곡을 짓는데 이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국가를 제정하기는 처음이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대한제국 애국가는 국내에서 작곡된 최초의 서양음악이기도 했다.

에케르트는 공로를 인정받아 고종으로부터 3등 태극훈장을 받았다.

민영환이 작사자라는 사실은 1980년대 후반 뉴욕 공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대한제국 애국가'라는 소책자에 애국가의 제정 경위를 소개한 민영환의 서문이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이 책자에는 한글 가사와 독일어로 번역된 가사가 수록된 대한제국 애국가의 악보가 실려있다.

대한제국 애국가가 국가가 된 이후 공식적인 국가 행사나 각급 학교의 행사에 반드시 태극기를 게양하고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침탈로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공식 국가가 되면서 대한제국 애국가는 탄생한 지 8년 만에 금지곡이 됐다.

기미가요의 작곡자 역시 에케르트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945년 해방된 후에도 에케르트가 기미가요를 작곡했다는 이유로 대한제국 애국가는 국가로 채택되지 못했다.

1852년 4월 5일 독일 슐레지엔에서 출생한 에케르트는 독일제국의 해군 소속 음악가였다.

일본 정부 초청으로 1879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해군 군악대 교사, 음악취조소(현 도쿄예술대학) 교사, 궁내성 아악과 전임교사로 근무하는 등 20년 넘게 일본에서 활동했다.

그는 일본 체류 중 기미가요를 작곡했다.

  에케르트는 1900년 3월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바로 대한제국의 초청으로 1901년 2월 28일 정규 군악대에서 사용할 각종 악기를 가지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군악대를 조직하고 대원들에게 서양악기 연주법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60여 명으로 구성된 대 취주악단의 군악대가 창설됐다.

군악대는 궁중 행사는 물론 행사가 없을 때도 궁중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했다.

에케르트는 서울 탑골공원에 음악당을 세우고 1903년 9월부터 매주 군악 연주회를 통해 서양음악을 시민들에게 소개하여 인기를 얻었다.

에케르트는 서양음악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가교 구실을 했고, 한국 현대음악의 선구자 김영환, 김재호, 백우용, 이병우, 이상준, 정사인, 홍난파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됨에 따라 군악대도 폐지됐다.

군악대 일원이 그해 11월 궁중의식, 의례, 제사 등을 관장하던 장례원에 편입되어 양악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나 1915년 3월 양악대마저 완전히 해산되어 대원들은 민간으로 흩어졌다.

에케르트는 군악대가 없어진 후에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개인 자격으로 음악을 지도하는 등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1916년 8월 6일 64세를 일기로 서울시 중구 회현동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조선에 묻히고 싶다는 생전의 희망대로 에케르트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에케르트는 구한말 설립된 법어(프랑스어)학교와 한성외국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프랑스인 에밀 마르텔을 1905년 사위로 맞았다.

마르텔은 1911년 한성외국어학교가 폐교되자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다.

1920년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제대에서 프랑스어 교수로 봉직했다.

일제강점기 말 서양인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진 가운데 1942년 강제 추방되어 중국 톈진으로 갔다가 해방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49년 세상을 떠나 그 역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마르텔의 딸, 즉 에케르트의 외손녀 한 명은 수녀가 됐다.

이마쿨라타 마르텔 수녀는 해방 전 원산에서 헌신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고생하다가 서독으로 송환됐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에서 봉사하다가 1988년 세상을 떠났다.

에케르트 가문은 3대에 걸쳐 한국과 일생을 함께한 셈이다.

    일제강점기 금지곡이었던 대한제국 애국가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독립군들이 이 노래를 불렀는가 하면 한일병합조약 이전에 하와이로 이민 갔던 조선인들이 멜로디를 기억하고 가사를 바꾸어 불렀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한미클럽에서 새롭게 작성한 악보에는 가사가 "상제는 우리나라를 도우소서/ 영원무궁토록/ 나라 태평하고 인민은 안락하야/ 위권이 세상에 떨치여/ 독립자유부강을 / 일신케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나라를 도우소서"로 되어있다.

  올해는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120년이 되는 해이다.

1897년부터 1910년까지 불과 13년을 버티고 단명했던 대한제국. 오는 27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문화재청이 마련한 대한제국 120주년 기념 공연에서는 이 대한제국 애국가가 울려 퍼질 예정이다.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 아래서 숨죽여 지켜낸 노래, 만주 벌판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국을 그리며, 독립을 염원하며 불렀을 노래. 대한제국의 운명처럼 암울하고 애잔한 느낌이 든다.

이 노래를 통해 조선인들은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민족혼을 지켜나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대한제국 애국가는 충분히 기억할 가치가 있다.

/언론인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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