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하버드 사회윤리학과 졸업 한국인 최초 하버드 졸업-최초 박사 사회법칙론 동경제국대 교재 채택 영문 출판돼 국내 학계 잘 안알려져 홍사단 주요인물 일제 탄압 심해 1945년 '코리아 타임즈' 창간

▲ 인당 하경덕 박사

안당(晏堂) 하경덕(河敬德) 박사는 우리 전북인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하 박사가 어릴 때 전북을 때 난 후, 줄곧 미국 아니면 서울 등 외지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이다.

하 박사는 1897년 6월 26일 전북 익산시 춘포(春浦)면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학자이며 기독교 장로였다.

그리고 전주 신흥학교에서 한문(漢文)교사를 지낸 분이다.

그래서 아들 하 박사를 기독교인으로 생활하도록 했으며, 또 이 같은 가정적 배경은 하 박사로 하여금 일찍부터 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기도 했다.

하 박사는 일찍이 기록계의 학교인 전주 신흥(新興)학교의 초등부에 들어가 1913년 졸업(2회), 이어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인 숭실(崇實) 중학교에 진학, 1918년에 졸업했다.

그 후, 서울의 YMCA학당에 들어 가 영어실력을 쌓은 후, 미국에 건너 가 그 곳에서 정규 고등학교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에 입학, 1925년 사회윤리학과를 졸업했다.

이어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1928년엔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Social laws’ 즉 ‘사회법칙론’(社會法則論)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그의 사회학관(社會學觀)과 독특한 연구업적이 잘 반영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이 영문(英文)으로 출판됐기 때문에 한국의 사회학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 박사가 하버드 대학 재학때 자주 접촉한 교수는 카보드 박사였으며, 또 그로부터 학문적 영향은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떻던 하 박사는 미국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한국인이며 한국인 최초의 박사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한 때 조교를 지내다가 1929년 귀국하여 1930년 서울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 사업조사위원회 총무로서 일하다가 1931년부터는 당시 연희(延禧) 전문학교(연세대 전신)에서 교수가 되어 사회학을 강의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는 사회학이 사회주의를 가르치는 학문이라는 조선총독부의 억지 주장 아래 선택과목으로 가르치던 사회학 강의가 금지되고 그 뒤로는 영문법을 강의했다.

여기에서 한가지 특기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 박사의 ‘사회법칙론’(社會法則論)이 일본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사회학 교재로 채택됐었다는 사실이다.

영문판이기 때문에 저자가 ‘경덕 하’ (KyongDeou Ha)로 돼있기 때문에 설마 한국인인지는 미쳐 몰랐던 것이다. 이렇듯 몇 년동안 교재로 사용하다가 마침내 저자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취소했다고 한다.

이 같은 경력으로 보아 하 박사는 분명히 우리나라 사회학계의 선구자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회학계에서는 덜 알려진 편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재직했던 연희전문에 사회학과가 없었으므로 사회학을 전공하는 제자를 길러내지 못한 점과 또 우리나라에서 사회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을 받고 또 독립하여 하나의 학문으로 사회학계가 형성된 시기에는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는 점을 둘 수 있다.

거기에 그의 주저(主著)인 ‘사회법칙론’이 영문으로 출판되어 국내 학계에서는 알려지기 힘들었고, 또 우리 나라 사회학 발전에 관한 연구나 사회학 관계 문헌 목록이 모두 8.15 광복이후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 박사의 저서는 이 밖에 ‘사회학 입문’(社會學入門)이 있다.

하 박사는 1943년 연희전문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가 당시 일본의 적국인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반동 학문이라고 하는 사회학을 강의한데다가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흥사단(興士團·안창호 설립)과 깊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로부터 탄압에 의한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 일제말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그들이 강요했던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의 특별학도병 강제 징집에 반대적이었다는 데에 기인하여 하 박사는 강제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1945년 광복이 됐으나 그는 학계로 돌아가지 않고 흥사단을 비롯하여 사회운동에 참여 했다.

그 해 9월 5일에는 영자(英字)신문 ‘코리어 타임즈’를 창간하여 사장을 맡았다.

당시 창간호에 실린 사설 ‘연합군 장병을 환영하노라’는 그가 직접 집필한 것이었다.

그는 이 사설을 영문(英文) 뿐만 아니라 물론 우리 말로도 써서 1면의 위 아래에 게재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1월에는 일제 때 소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새 출발할 때 부사장이 되어 1949년까지 재임했다.

이 동안 1945년 12월부터는 사장 직무대행을 맡았고 46년 6월부터는 위창 오세창(韋蒼 吳世昌) 사장에 이어 2대 사장이 됐다.

그 해 1946년 11월부터는 합동통신(合同通信)의 취체역(取締役·이사)을 겸하기도 했으며 월간 ‘신천지’(新天地)를 발행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탓으로 미군정(美軍政) 당국과는 무척 가까웠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던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과도 교분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1947년에 탄생한 미군정의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立法議院)의 관선 의원이 되기도 했다.

또 이듬해에는 인도(印度)에서 개최됐던 ‘범아시아 문화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일도 있다, 그 후에도 국제문화협회장과 한미문화협회장 등을 맡았었다.

이 같은 요직은 그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아 미국의 각계 요인들과 가까웠기 때문에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자 하 박사는 모든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 이유는 그가 흥사단의 주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박사와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는 별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이 박사와 흥사단의 창설자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과의 사이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부터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하 박사는 1950년 6.25 때 피난을 못하여 서울에서 숨어 있을 때 북한 인민군에 발각되어 끌질긴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이를 물리 쳤다.

실로 구사(九死)에 일생(一生)을 얻어 일본 동경에 있는 맥아더 장군을 찾아 그 곳에서 특별 촉탁으로 위촉을 받아 고문역을 맡았다.

그러던 중 1951년 그곳 일본에서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54세였다.

 

연합군 장병을 환영하노라

晏堂(안당) 河敬德(하경덕) 일자(一自) 극동(極東)에 전쟁이 발발한 이래 우리 조선 민족은 제자(諸子)들을 해방세력(解放勢力)으로 인정하고 제자들에게 신속히 승리가 오기를 기원하였노라.

무장도 없고, 질곡에 처하여 있는 민족인지라 제자들과 어깨를 겨루고 전장(戰場)에 부(赴)치 못함을 통탄하였고, 한갓 해외에 있는 우리 동포가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각기 직무를 이행한다는 일념에서 위안을 구하였노라.

전화(戰禍)가 참혹하여 제자(諸子)들 중 사상자(死傷者)에 관한 보도가 답지할 때에 우리가 몸은 비록 제자들과 원리(遠離)하여 있었으나 마음은 제자와 공(共)히 전사(戰死)한 장병을 위하여 애도 하였노라.

과달캐날로부터 마샬군도(群島)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의 분전을 교족기대(翹足企待) 하였으며 싸이판과 오키나와()와 기타 전략요지에서의 제자들의 승리를 열렬히 찬상(讚賞)하였노라.

우리는 연합군 장병을 환영하노라.

전쟁 개시 이래로 제자들의 우구(憂懼)하던 바는 우리의 요구하던 바이요, 제자들의 환열(歡悅)하던 사면팔방(四面八方)에 있어서 제자들의 업적은 가상(可賞) 하였도다.

제자들은 영웅적 업적으로 인하야 우리의 경앙(敬仰)의 적(的)이 되었도다. 제자들의 영웅적 정신은 우리의 국가 재건 사업의 지주가 될지어다.

우리의갱생국가(更生國家)는 제자들의 견실고결(堅實高潔)한 원조를 요하며 현하 세계 신질서에 있어 제자들과 우리는 인종의 차와 국적의 별(別)은 불구하고 친화호조(親和互助)를 요함인새니라.

이로써 연합군 장병 환영의 뜻을 표하노라.

1945년 9월 5일 <코리아 타임즈 창간호 1945. 9. 5>에 (국·영문)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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