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운 성품 정도를 지키는 '행정의 달인'
너그러운 성품 정도를 지키는 '행정의 달인'
  • 전북중앙
  • 승인 2017.10.2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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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장수 조상대대로 남원-장수 정착
21세 생원시 합격 28세 성균관 학관 벼슬
1392년 세자 우정자 정6품 인정받아
국정 시비-곡직 엄격히 구분 청빈생활
60년간 벼슬살이중 거치지않은 부서 없어
종자개량-군사제도 정비-첩소생 부역면제
폐세자 반대 이직 남원으로 4년간 귀양
세종때 18년간 영의정 재직 업적 많아
태조실록-치평요람-오예의 제도 등

황희(1363~1452) 정승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60년이란 오랜 세월을 관직에서 보냈다.

그 중에서 조선조에서만도 4대 왕에 걸쳐 53년 동안을 관료로 국가에 봉사했다.

영의정 18년에, 좌·우의정 등을 합해 정승으로만 무려 24년을 지냈다.

그러고 보면 세종조 32년의 반 이상을 ‘1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된다.

이같이 유명한 재상 황희, 그는 과연 누구인가.

1363년 (고려·공민왕 12), 이 고장 장수(長水) 출신의 자헌대부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였던 황군서(黃君瑞)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그가 태어난 곳은 개성(開城)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부친의 공직생활 관계로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이 고장 남원~장수, 다시 남원에서 살다가 관직 따라 개성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새 왕조의 천도 후에는 한양에 이주하여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황희 정승은 이 고장 출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그의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또 그의 조부의 묘는 현재 남원(南原)땅 대강(帶江)면에 있다.

그러므로 누가 무어라해도  ‘자랑스러운 우리 전북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어릴 때 이름은 수로(壽老)라 불렀고, 자는 구부(懼夫)요, 호는 방촌(厖村),시호는 익성(翼成)이다.

  황희는 나라의 안팎이 매우 어지러워 사실상 고려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21세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했다.

이어 27세 때 문과에 14번의 성적으로 급제했고, 28세 때 처음으로 성균관 학관이란 벼슬을 얻었다.

이 해가 1390년으로 고려의 마지막 공양왕(恭讓王) 때이다.

  그 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 선 초기에 황희는 일단 새 왕조에 항거하는 72명의 고려 유신(遺臣)들과 두문동에 들어갔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0세, 그러나 젊고 유능한 젊은 인재는 새 왕조에 참여하여 국정을 보살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에 의해 두문동을 나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처음엔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다만 조선왕조가 건국한 1392년에 비로소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 우정자(右正子·정6품)가 되었다.

그가 이 자리에 앉는데는 경학에 밝고 단정한 선비라고 해서 특선으로 뽑혔었다.

이로써 앞으로 60여 년간 기복이 많았던 그의 생애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황희’하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은 성품을 지닌 재상”이라고 말한다.

또 우리나라 역사상 누구보다도 가장 청렴하고 충효심이 지극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더구나 깐깐히 시비를 가리지 않는 사람을 일러 ‘황희정승 같은 사람’이라는 속담까지 있다.

이것을 보면 그는 그야말로 ‘원만한 인격자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황희는 풍채도 훌륭했지만 성격 또한 원만했다.

이 모두가 사실과 다름없이 그는 원만하고 관홍(寬弘)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으며 인격자였다.

  그의 풍모와 성품에 대한 사실과 일화를 더듬어 보면 재미나는 이야기가 많다.

특히 성품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방촌선생 실기’에 따르면 85세 때의 풍모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얼굴은 붉으스레 하고 머리는 희며 바라보건대 신선과 같다.”  (紅顔白髮 望之苦神化) 라고 했고 원만한 성품을 지닌 인격자라는 일화를 보면, 하루는 집안 종들이 서로 싸운 일이 있었다.

싸움이 끝나자 한 종이 황 정승에게 싸움을 하게 된 동기와 상대방의 잘못을 낱낱이 말하고 자기의 정당함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황희는,   “과연 네 말이 옳구나…” 하고 그의 말을 그대로 시인한 후 그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잠시 후에는 싸움을 한 다른 종이 찾아와서 역시 상대방의 소행이 나빴다고 낱낱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황 정승은 이번에도 또 다시,   “듣고 보니 과연 네 말이 옳구나” 하고 전과 다름없이 그의 말도 시인했다.

  이 때 마침 옆에서 시종 이 광경을 보고 있었던 집안 조카가 하도 답답해서,   “모든 일에는 일시일비(一是一非)가 있는데 아저씨께서는 어찌하여 두 사람의 말이 모두 다 옳다고 하십니까요” 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황희는 태연히 “그래 네 말도 또한 옳구나…” 하고 조카의 말도 옳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황희 조카의 말대로 모든 일에는 일시일비가 있음을 모를 리 없겠지만 그렇게 말한 것은 점잔은 어른으로서 어찌 노비들의 시비에까지 개입하랴하는 뜻일게다.

그렇다면 이 또한 점잖고 너그러운 성품에서 나온 밀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황 정승은 일단 국정에 임해서는 절대를 그렇지가 않았다.

시비·곡직을 엄격히 구분하여 바르고 옳은 일이 아니면 결코 행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바른 말을 잘하여 마침내는 파직, 좌천, 귀양살이까지도 한 사실을 보아도 그의 곧은 성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야말로 사심없는 정치인의 표본이었다.

  평생을 그는 관직에서 좌천 2회, 파직 3회, 서인(庶人)이 되기 1회, 귀양살이 4년을 겪은 일이 있다.

그래도 그의 주장은 정당했고, 또한 청빈한 생활이 인정받았기 때문에 다시 풀려나곤 했던 것이다.

그는 말년까지도 학문을 닦는데 게으르지 않아 높은 학덕을 쌓을 수 있었다.

또 그랬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언제나 참신했으며 후진들의 사고에 뒤지지 않았다.

  태종대왕은 이런 그를 두고 “황희는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그를 공신으로 대우했다. 또 나는 하루라도 그를 대하지 않으면 반드시 불러서라도 만났다. 뿐만 아니라 하루도 그에게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뿐만 아니었다.

태종은 그가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전의를 보내 치료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하루에 서너 번씩 안부를 물었다.

 그는 무려 60년 동안에 이르는 벼슬살이 중 6조 판서 등 거의 거치지 않은 벼슬과 부서가 없었다.

그러므로 국정에 대해서는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밝았으며 가장 많이 알았다.

일을 의논할 때는 정도(正 道 )를 따르고 편법을 취하거나 쉽게 타협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각종 제도를 번거롭게 거치는 것을 삼갔다.

  그래서 그의 손으로 이룩된 정책, 법령, 개혁 등은 수없이 많았다.

여기에서 그의 업적을 몇 가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우선 농업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먼저 각종 종자개량에 착안하여 농가소득 증대에 주력했다.

또 뽕나무 재배를 적극 권장하여 의(衣)생활의 개선과 풍족에 주력했다.

  뿐만 아니라, 국방정책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밝은 편이었고 또 이에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갖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군사제도의 많은 개혁과 정비를 단행 했다.

즉 북방에서 준동하는 야인을 물리쳤고, 남방에 자주 침입하는 왜구에 대한 방비책을 강화하는 등 국가안보태세를 갖추었다.

그가 이렇듯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로 재직했을 때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는 이유로 북방 변경인 함길도의 경원서원(慶源書院) 교수로 좌천됐을 때 틈틈이 병서(兵書)를 읽었던 것이 마침내 국방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인권문제에 있어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첩의 소생에 대한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당시 첩의 소생은 아주 말할 수 없는 천대를 받았으며 천역(賤役)이란 제도에 의해 강제 부역을 당했었다.

이 같은 제도는 인권상 맞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에 태종임금도 찬동하여 실현을 보았다.

이같이 그의 많은 개혁으로 마침내는 태종대에 국가기반을 튼튼히 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그는 남다른 청백리였다.

아마 우리나라 역사상 고관대작으로 황희 정승만큼 청백했던 공직자도 드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가지 예를 들면,  하루는 태종왕이 황희의 집에 들른 일이 있었다.

왕이 방에 들어, 자리에 앉으려 자리를 보니 장판방이 아니라 멍석이 깔려 있었다.

이에는 왕도 깜짝 놀랐다.

이에 임금은,  “이 자리는 가려운데 긁기에 알맞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국의 정승집의 방바닥이 이토록 멍석으로 깔려 있다니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그리고 그는 항시 단벌옷으로 지냈다.

한번은 집에서 옷을 세탁하는 사이에 갑자기 입궐 하라는 기별이 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잠뱅이 위에 조복을 걸치고 입궐했다가 세종대왕에게 들킨 일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부인도 자부의 윗옷 한 벌 갖고 번갈아 입으면서 나들이 했다는 일화도 있다.

  황희는 대의에 어긋나는 일은 반드시 바른 말을 하여 시정토록 노력했다.

태종 16년 54세 때의 일이다.

당시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두호하다가 호조판서에서 공조판서로 좌천된 일이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2년 후에는 셋째 왕자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세자로 책록하자 그는 이를 극력 반대했다.

태종은 이를 이유로 마침내는 벼슬을 뺏고 그를 서인(庶人)으로까지 몰아치면서 마침내는 경기도 파주땅 교하(交河)로 귀양을 보냈다.

  그 후, 다시 태종은 폐세자를 반대한 이직(李稷)과 함께 그의 향리인 이 고장 남원(南原)으로 이치(移置)했다.

그것은 서울근처에 둘 수 없다는 조정 신료들의 빗발친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그 때 태종은 그를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고 훗날 말했었다고 한다.

  황희는 남원에서 4년간에 걸친 귀양살이를 했다.

그는 남원에서 6대조 감평(鑑平)이 일재(逸齋)라는 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자리에 새로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고 불렀다.

그 후, 이 광통루는 전라감사 정인지(鄭麟趾)가 광한루(廣寒樓)라고 고쳤다.

  태종은 그 후, 황희가 60세 되던 세종 4년(1422) 2월에 귀양살이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는 세종에게 세자책립 반대를 싸고 그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괜찮은 사람이니 중용토록 부탁했다.

당시 태종은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있었다.

이같이 사람을 볼 줄 아는 태종, 황희를 이해하는 세종, 두 임금에 충성을 다한 황희 실로 군신간의 의가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짐작케 한다.

  황희는 특히 세종조 18년간에 걸친 재상(영의정) 재직 중에 더욱 빛나는 업적을 많이 남겼다.

  우선 그 업적 중 몇 가지를 들어보면, ▲ 태조실록 편찬    ▲ 치평요람(治平要覽), 역사병요주상정(歷史兵要注詳定) 등을 작성, 행정과 국방정책의 기본이 되게 했으며    ▲ 평안도 약산(藥山)에 진을 설치, 북방 변경의 경비에 만전을 기했다.

  이밖에 오예의(五禮儀)제도를 만들었다.

이것은 예법으로서 구폐를 바로 잡는데 진력한 것이다.

당시 원나라의 영향이 많았던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식과 우리나라식과 우리의 현실을 충분히 조화시켜 개정한 것이다.

  즉 오례(五禮)란   ① 길례(吉禮)   ② 가례(嘉禮)   ③ 빈례(賓禮)   ④ 군례(軍禮)   ⑤ 흉례(凶禮) 등 다섯 가지다.

길례는 제례(祭禮)이며, 가례는 관혼, 빈례는 외교, 군례는 군사, 흉례는 상례(喪禮)를 말한다,   이밖에도 황희는 그동안에는 원집(元集)과 결집(結集)으로 분리되어 그 내용이 한결같지 않고 중복되었거나, 누락된 부분이 많았으며 또 거기에 내용과 현실이 맞지 않은 것을 철저히 가려 수정 내지는 보안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다시 펴냈다.

황희는 죄인을 다룰 때도 항상 인권 문제를 생각하면서 너그럽게 처리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경솔하게 남의 죄와 형벌을 정할 수는 없다. 죄상을 잘 모르고 중형을 선고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죄를 가볍게 처리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는 특히 세종 때에는 육조(六曹) 판서와 좌·우의정 등 많은 벼슬을 거치는 동안 국정 전반에 걸쳐 광범하고 깊이 있는 경험과 식견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얻은 경륜을 18년에 걸친 국정을 총괄 하는 영의정으로서 더욱이나 국왕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가운데 소신있게 국정을 폈다.

  세종 말기에 숭불(崇佛)문제로 왕과 유학자, 중신 간에 큰 마찰이 생긴 일이 있었다.

발단은 세종임금이 궁중 안에 불당을 설치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숭유배불(崇儒排佛)이란 국시를 무시한 것이라 하여 소란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성균관 유생들이 박차고 나와서 권당(捲堂)을 한 일이 있었다.

즉, 오늘날의 반대 데모를 벌였던 것이다.

당시 그 주모자의 한 사람 중에 이 고장 출신이며 가사 상춘곡(賞春曲) 작자로 유명한 정극인(丁克仁)이 있었다.

그 때 왕은 이들을 극형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 군신간의 소동은 황희의 조정으로 이내 해결을 보았다.

  황희는 이같이 명 참모로서 또는 행정의 달인으로서, 조정의 명수로서 왕을 잘 보필하면서 국정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세종임금을 성군(聖君)이 되게 했으며,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끄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따라서 황희를 조선왕조 5백년을 통해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추앙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 황희의 시문(詩文)  

맑고 맑은 경포 물에 초승달이 젖었는데 높고 높은 한송정(寒松亭)에는 푸른 연기 끼었구나 아침 안개는 땅에 자욱하고 경포대 대숲은 푸르르라 티끌 세상에도 또한 해중 선경이 있구나                           

-강원 관찰사 때 ‘경포대’에서  

대추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들으며 벼 빈 그루에 게는 어이 나르는고 술 익자 체 장사 돌아가니 아니먹고 어이리   나이 일흔에 체찰사 되어 북녘에 오니 멀고 먼 변방 땅 끝이 바로 여기로세 다행히 주인의 마음이 정중하고 창안백발이 오히려 풍류를 알도다.

(吉州縣 객사에서) 황희는 부모를 모시는 효도도 남달리 지극했다.

아침 저녁에 관복을 입고, 문안을 드렸고, 손수 맛있는 음식을 갖추어 봉양했다.

또 부모의 뜻을 평생동안 단 한번도 거역한 일이 없었다.

이 같은 황희의 행적을 통해 후세 사람들은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다.

첫째, 정사(政事)에 있어는 언제나 중정강건(中正剛健)함을 보였다.

매사에 지나치거나 모자람이나 치우침이 없이 곧고 올바르며 의지나 기상이 굳세고 꼿꼿했다.

둘째, 황희는 철저한 청백리였다.

당시 그만한 지위에 있으면 얼마든지 호강도 하고 호사스런 생활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지나치리만치 청빈한 생활을 했다.

그의 청백했던 여러 가지 일화를 접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대목이 많다.

그래서 그를 ‘조선조 최고의 명재상’이라고 숭앙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품이 지나치게 너그러워서 그랬는지 그는 가솔들 때문에 여러 번 구설수에 올라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일도 몇 번 있었다.

아들은 물론, 사위등 친,인척들이 저지른 일로 곤혹을 치룬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장남 치신(致身)이 새집을 짓고 집들이를 할 때 여러 손님들을 초대한 일이 있었다.

이날 아버지 황희는 집안을 두루 돌아보고는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 나가 버렸다.

집을 지나치게 호화롭게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초대된 손님들도 모두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들 치신은 크게 뉘우치고 집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셋째 아들 수신(守身)은 벼슬에서 많은 공을 세워 재상까지 올랐지만 여러 가지의 잘못으로 탄핵과 고발을 당하여 고초를 여러번 겪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버지 황희의 후광과 국왕의 신임으로 화를 면하곤 했다.

  세종 9년에는 황희의 사위 서달이 자기가 영의정의 사위인데 그것도 모르고 함부로 까분다고 지방의 아전을 때려죽인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져 맹사성(孟思誠)이 적당히 무마하려 했지만 결국은 이 사건으로 인해 황희와 맹사성을 함께 파직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의 배려로 2주 만에 다시 풀렸다.

황희는 84세 때(1449·세종31년)에 비로소 60년간의 관직생활에서 물러났다.

당시의 벼슬은 물론 영의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황희는 1452년 2월 8일 90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대왕이 승하한 다음해이다.

죽은 뒤 세종 능에 배향되었으니 그는 죽은 뒤까지도 세종 임금과는 떨어질 수 없게 된 셈이다.

어쨌든 태종이 이씨 왕조의 기초를 닦고 세종이 태평성대를 이룩한 것은 그 밑에 황희정승 같은 명재상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황희가 세상을 떠난 후의 일들에 대해 ‘문종실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세종 능에 배향토록 했다. 온 조야에서 슬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서리와 각 기관의 심부름꾼 까지도 재물을 올려 제사를 지냈으니 이는 옛날에는 볼 수 없었던 일…” 이라며 온 나라, 온 겨레가 한결같이 슬퍼했다고 오늘에 전한다.

1455년 세조는 황희의 셋째 아들 수신을 영의정까지 시켰다.

이렇게 부자(父子)가 영상(領相)에 오른 것도 드문 일이다.

그밖에 오늘날 황희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우리 전북 도내만도 창계서원(滄溪書院·장수), 풍계서원(豊溪·남원), 용진서원(龍進·완주)에 배향되어 있다.

또 파주영당, 연배영당, 화산사(華山祠·진안), 노안영당(나주), 낙하정(落河亭·파주)에는 그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

황희 정승이 평생을 두고 이토록 높은 벼슬을 많이 하게 된 것은 그의 부친 군서(君瑞)가 조상의 묘를 잘 썼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지금 황희의 할아버지(황균록)가 묻혀 있는 묘는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신촌마을의 산이다.

이 산은 풍수에서 말할 때 ‘홍곡단풍혈’(鴻谷丹楓穴)이라고 하여 우리나라 8명당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 묘는 최근까지 17대손 학주(鶴周)씨가 풍계서원까지 돌보고 있었다.

황씨 문중에서는 이 명당에 묻힌 할아버지의 덕으로 황희와 같은 큰 인물이 태어났으며 또 자손들이 번성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황희의 후손으로서 저명한 인물로는 셋째아들로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수신(守身)을 비롯, 명종·선조 때의 대제학 황정욱(黃廷彧), 선조 2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 온 황윤길(黃允吉), 임진왜란 때 이치(梨峙) 대전의 영웅이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장군 등이 있다.

그 후대로 내려와서는 구한말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망국한(亡國恨)을 품고 순절했던 유일한 선비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유명하다.

현대의 인물로는 국사학자 황의돈(黃義敦), 정계에서는 국회 의장을 지낸 황낙주(黃珞周), 국회의원 황인원(黃仁元), 전 총무처장관 황영하(黃榮夏), 군부계통에는 전 육군 참모총장 황영시(黃永時), 전 해군 참모총장 황정연(黃汀淵), 예비역 육군소장 황필주(黃弼周) 등이 있다.

문화계에서는 고 황정순(黃貞順·탤런트) 황인룡(黃仁龍·아나운서) 등이 유명했다.

영원한 명 재상 황희, 행정의 달인이요, 조정의 명수, 청렴 ‧ 사심없는 정치인의 표본 성군 세종 도와 태평성대 이뤄   
      

是曰也 放聲大哭   張 志 淵      

저번에 이등 후(伊藤候)가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候爵 伊藤博文)은 평소에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한다고 자처하던 사람으로, 오늘날 그가 와서는 반드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굳게 부식코자 권고하리라”하여 항구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아니 하였다.

그러나 천하 일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다.

천만 뜻밖에 5조약이 제출되었다.

이 조약은 비단 한국을 망하게 할 뿐 아니라 실상 동양 삼국의 분열을 빚어낼 조짐이라 하겠다.

그러면 이등 후의 본래 주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 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지 하지 아니 하였은 즉, 그 조약이 성립되지 못한 것은 이등후 스스로가 알았을 것이다.

아! 저 개 돼지만도 같지 못한 이른바 정부 대신이란 자는, 자기네의 영달과 이익을 바라고 위협에 겁을 먹어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어, 4천년을 이어 온 강토와 오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생령(生靈)을 모두 남의 노예노릇을 하게 하였다.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과 각 대신들은 족히 깊게 나무랄 것도 못되나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불구하고 다만 부(否)자로써 책망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단 말인가.

김청음(淸陰 金尙憲)의 열서곡(裂書哭)도 할 수 없고, 정동계(鄭桐溪)의 도사복(刀事腹)도 할 수 없어 그저 살아남아 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와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하리오.

아! 원통하고 분하다.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군 기자 이래, 4천년의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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