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몇 해를 청국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어, 조선대군주 폐하께서 지금은 세계에 제일 높은 임금들과 동등이 되시고 조선 인민이 세계에 자유하는 백성들이 되었으니, 이런 경사를 그저 보고 지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요 조선 독립된 것을 세계에 광고도 하며, 또 조선 후생들에게도 이때에 조선이 영령히 독립된 것을 전하자는 표적이 있어야 할 터이요…모화관에 새로 독립문을 짓고 그 안을 공원지로 꾸며 천추만세에 자주독립한 공원지라고 전할 뜻이라, 이것을 할양이면 정부 돈만 가지고 하는 것이 마땅치 안 한 까닭은 조선이 자주독립된 것이 정부에만 경사가 아니라 전국 인민의 경사라 인민의 돈을 가지고 이것을 꾸며 놓는 것이 나라에 더 영광이 될 터이요, 후세라도 내외 국민들이 이 독립문과 독립 공원지를 보거드면 건양 원년에 누구누구가 돈을 얼마 얼마를 내어 전국 인민을 위하여 양생과 운동하는 데를 만들어 놓고 조선 자주독립 한 것을 경사로이 여겨 영생 불멸할 표를 하였다고 할 터이니, 물론 누구든지 조선 인민이 되어 임금을 존경하고 국기를 높이 달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다소간에 추렴을 내야 대정동 조선은행소에 있는 안경수 씨에게로 보내거드면, 안경수 씨가 신문사로 보조금 낸 사람의 이름과 돈 수효를 기별하여 매일 광고할 터이요…"

1896년 7월 4일 자 독립신문 1면 서재필이 쓴 논설의 일부이다. 독립문 건립의 취지를 설명하고 성금을 내줄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날 독립협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초대회장이 안경수, 창립위원장이 이완용, 위원은 권재형, 김가진, 김종한, 남궁억, 이상재, 이윤용 등이었다. 

그해 11월 21일 착공을 알리는 정초식(定礎式)이 거행됐고, 만 1년 후인 1897년 11월 20일 독립문이 완공됐다. 120년 전의 일이다. 

정초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주최 측과 시민 5천~6천 명이 모인 가운데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선가,' '독립가,' '진보가'를 불렀고 영어학교 학생들이 체조 시범을 보였다. 배재학당 교사 아펜젤러가 기도했고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 한성판윤 이채연, 외부대신 이완용이 연설했다.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을 위해 서재필 독립신문 사장이 영어로 연설했다. 

 
 

독립문 건립은 독립협회의 발의로 고종의 동의하에 추진됐다. 자주독립국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영은문 자리에 세워졌다. 갑오개혁 후 철거된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영빈관인 모화관의 정문이었다. 비용은 전 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벌여 충당했다.

사적 제32호 독립문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있다. 독립문은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 출신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 사바틴이 설계했다. 심의석이 토목, 건축 등 공역(工役)을 담당했으며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해서 노역을 시켰다. 창건 당시 면적은 2,800㎡였고 총 공사비는 3천825원이었다. 

높이 14.28m, 너비 11.48m, 두께 6.25m로, 45cm×30cm 크기의 화강석 1천850개를 쌓아 올렸다. 문 중앙에 아치형의 홍예문이 있으며, 문 꼭대기에는 네 귀에 탑 모양의 사각기둥을 세우고 이를 난간으로 연결했다. 홍예문의 중앙 이맛돌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李花) 무늬가 방패 모양의 문양판에 새겨져 있다. 상단 현판석에는 앞뒷면에 가로쓰기로 '독립문'과 '獨立門'이라 각각 음각하고, 좌우에 태극기를 새겨넣었다. 독립문 앞 돌기둥 두 개는 영은문을 받치고 있던 주춧돌이다(사적 제33호). 독립문은 1979년 고가도로 공사로 원위치에서 서북쪽 약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했다. 


'독립'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당연히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떠올린다. 독립문은 반일(反日)의 상징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반청(反淸)의 상징이었다. 독립문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 자 논설에는 "하나님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과 청국이 싸움이 된 까닭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라는 대목이 나온다. 독립문 설립의 주도세력은 일본을 청일전쟁에 승리해 '청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킨 나라'로 받아들였다는 인상을 준다.

독립문 현판을 누가 썼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독립협회 창립위원을 지냈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가진이 썼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1924년 7월 15일 자 동아일보는 '내 동리 명물(名物)-교북동 독립문'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독립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내용이 나온다.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에 이완용 형제는 100원씩 200원을 내놓았다. 발기인 가운데 가장 많은 액수이다. 이완용은 1898년 독립협회 회장까지 됐다. 독립협회에서 이완용이 중요 인물이었으니 현판을 썼을 수도 있다. 당시 독립신문은 이완용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김가진은 구한말 주일본 공사를 역임한 인물로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았으나 즉시 반납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상하이로 망명,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 총재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했다. 한학 및 서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독립문은 일제강점기 내내 존속했다. 일제가 독립문을 조선 독립의 열망을 담고 있는 상징물로 생각했다면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일제 당국은 1928년 4천100원의 거액을 들여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1936년 5월에는 건립한 지 불과 40년도 되지 않은 독립문을 고적(제58호)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일제는 독립문을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내세웠으며 자신들은 조선의 독립을 도왔다고 주장하고 싶었을 수 있다. 또한, 건립을 주도한 독립협회 회원 다수가 친일파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독립신문은 모금을 독려하는 기사를 수차례 내보냈다. 성금을 낸 사람의 이름과 기부 액수, 사연을 일일이 소개했다. 초반에는 호응이 대단해 시장 상인, 소학교 학생, 군인, 기생까지 앞다투어 동참했다. 황태자(순종)가 1천 원을 하사하고 내각 대신들도 100원 이상씩을 내놓았다.

그러나 초반의 열기가 점차 식어가면서 독립신문은 여러 차례 기사를 통해 비용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성금을 내달라고 호소했다. 요란했던 정초식에 비해 준공식 관련 기사도 찾아볼 수 없다. 독립문은 건립 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퇴락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처음 시작이 어찌 됐건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은 후에는 독립문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변모했다. 3.1운동 당시 14m가 넘는 높다란 독립문 꼭대기에 누군가가 태극기를 꽂아놓아 일본 경찰이 소방차를 동원해 이를 뽑아내는 일도 벌어졌다. 일제가 독립문을 어떻게 이용하든 독립문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우리 민족의 의지대로, 일제로부터의 독립의 표상으로 거듭난 것이다. 

독립문은 개화기 민족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독립문 설립 당시의 자주 민권과 독립 자강의 꿈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활동은 신분을 초월해서 대중의 참여를 끌어냈다는 의미가 있다. 

120년의 성상을 지나 독립공원 한가운데 굳건히 서 있는 독립문. 우리가 독립문을 아끼는 것은 독립문에 친일파의 흔적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문 건립에 한푼 두푼 보탠 민초들의 피와 땀, 독립 자강의 염원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김은주 중앙라운지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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