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예술 겸전한 국문학계의 큰 별 '가람'
학문-예술 겸전한 국문학계의 큰 별 '가람'
  • 전북중앙
  • 승인 2017.12.1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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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3월5일 익산 여산 태어나
1969년 11월 29일 향년 78세 별세
호남학회 총무 계몽활동 참여
조선어학회 사건 1년간 옥고 치뤄
순수한 한국 고유의 문학 논중
호탕-소탈하며 해학-풍자 좋아해
1967년 고회기념 논문집 발간

1968년 11월 29일은 우리 정신사(精神史)에 참을 수 없는 비극을 몰고 온 날이다. 그것은 우리 국문학의 지평선 위에 눈부시게 빛나던 <가람>이란 별이 이날 새벽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가람선생의 업적은 바로 우리에 또 하나의 슬픔과 어둠을 안겨 주었다. 선생의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끼친 공적을 새삼 나열한다는 것은 오히려 부질없는 속된 예의일 것이요, 이 나라 고전의 발굴에서 비롯한 주석(註釋)과 평론에 이르기까지 무비주옥(無比珠玉)이 아닐 수 없으니, 선생은 국문학도의 앞길을 밝히는 영원한 등불로 빛날 것이다.
  선생이 국문학사에 세우신 드높은 봉우리는 의연히 솟구쳐 그 지맥(支脈)을 헤아릴 수 없으나 차라리 선생은 국문학자이기 전에 천생의 시인으로 오늘날 시조(時調)를 세워 신조(新調)로 정형(整形)한 새 가락은 선생의 이론과 작품에서 그 남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 나라 시조시단(時調詩壇)에서 무수히 빛을 던지면서 있는 젊은 시조시인들이 모두 가람 성좌(星座)를 운행하는 별들이니, 선생의 온후하신 성용(聲容)에 접할 길 없는 것을 호곡(號哭)으로 메꿀 수 있으랴.
 

풍란(風蘭)이 바야흐로 벌어졌습니다.
방렬청아(芳烈淸雅)한 향(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난대밀림(暖帶密林) 속에나 앉았는 듯 합니다.
틈나시거든 왕림하시압.
   선생이 생전에 보내신 글발이다.
  아마 어느 해 늦은 봄이었다고 기억된다. 글월을 받던 바로 선생을 찾았고, 그날 선생과 더불어 두견주(杜鵑酒)를 기울이며 좀체 틈을 주지 않는 선생의 장광설(長廣舌)을 경청하던 것이 어제런 듯 선하다.
  봄이 지나면 바로 뒤이어 연엽주(蓮葉酒)의 계절이 선생을 찾아온다. 이때쯤 되면 풍란도 이울고 뜰에 백련(白蓮)이 소담하게 피어 그윽한 향기가 솔곳이 들려오는 오목대 아래 양사재(養士齋) 서재에는 선생의 지기와 제자들이 둘러앉아 호방한 선생의 웃음소리 속에 연엽주 잔이 오고 가기 마련이다.
  고매(古梅)처럼 허울다 떨어져 버린 그 고매한 풍모에 어울리는 담소에서 풍겨오는 선생의 담담하면서도 뜨거운 인간애를 어찌 한 두 송이 매화꽃 봉오리에만 비기랴.
  청지빛 하늘이 오목대를 넘어가는 가을철이면 양사재에는 또다시 국화주의 향기가 드높은 시절이 오는 것이다. 이에 앞서 포광(包光) 선생과 더불어 국화주를 기울이면 오고가는 이야기는 그대로 속진(俗塵)을 떠난 청담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호방하고 무애한 기질을 그 애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애란(愛蘭), 애서(愛書)에서는 지극히 섬세한 성품의 일면을 볼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이 상반된 성격의 조화에서 선생의 주옥같은 시조의 가락이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오늘도 온종일 두고 비가 줄줄 내린다
꽃이 지면 蘭草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 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주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난초·3)
   이 난초에도 선생의 그 섬세한 마음을 우리는 역력히 읽을 수 있다. 유명을 달리한 이날 국화주에 담았던 그 호방한 웃음소리도 장강(長江)처럼 그칠 줄 모르던 장광설도 들을 길이 없으니 빈 가슴은 메울 길 없을진저!
  항상 속무(俗務)에 얽히고 쫓겨 선생을 자주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할 뿐, 다만 선생이 남기신 학문과 인격을 받들어 어둔 앞길을 밝힐 것을 다짐하고 삼가 분향 합장으로 선생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1968.11.29.)
 
평생을 우리 글·말 지킨 학자
가람 李秉岐 선생
일제말 한글학회 사건 1년 옥고
시조문학의 현대화운동의 선봉
귀중본 등 장서 모두 서울대에
제자·난초·술복 등‘3복’누려
 
- 李 治 白 -
    우리 국문학계의 큰 별이었던 가람. 또 우리 고유의 민족문학인 시조(時調)의 현대화 운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했던 이병기(李秉岐) 선생이 1969년 11월 29일 새벽 향리인 익산시 여산에서 세상을 떠난지도 어느덧 4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향년 78세였다.
  가람은 1891년 3월 5일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진사동)에서 훗날 변호사가 되는 이채(李) 선생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아버지 이채 선생은 변호사 활동을 하는 한편 서울에서 1906년 전라도 사람들로 조직된 호남학회(회장 高鼎柱)의 총무 간사가 되어, 호남인의 단결과 계몽활동에 참여한 바 있는 지식인이었다.
 
한손에 책을 들고 조으다 선 듯 깨니 
드는 볕 비껴 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난초①  가람 이병기
   또 평생을 오직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키워온 가람은 1901년 전주보통학교(현 전주초등)을 거쳐 서울의 한성사범(漢城師範) 학교를 졸업했다. 특히 가람은 이 한성사범 재학 때인 1912년 수학여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바도 있었다. 그리고 이해 조선어 강습원에서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 선생을 만나 한글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때부터 가람은 평생에 걸쳐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지키는데 몸과 마음을 바치게 된다.
  그리고 가람은 한 때 전주 제2보통학교(현, 전주 완산초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제자중에는 훗날 광복후, 서울대 문리대 교수와 학장을 지낸 국사학자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박사가 있다.
  이어 서울의 경복고를 비롯, 덕수상고 및 휘문(徽文)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특히 휘문고보의 제자 중에는 훗날 우리 문단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시인 정지용(鄭芝溶),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과 소설가로 이름있는 상허(尙 虛) 이태준(李泰俊) 등이 있었다. 또 정지용과 동기이며 훗날, 문교부 장관을 지낸 이선근(李瑄根)박사도 그 제자였다. 당시 가람은 한편으로는 보성전문(현, 고려대), 연희전문(현,연세대)에 출강했었다. 특히 일제말기에 있었던 유명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 때는 우리 말과 글을 지키려다가 일제에 의해 1년이란 세월에 걸쳐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이렇듯 학문과 예술을 겸전한 애국지사이기도 했던 가람은 학자로서 특히 ‘시조문학’에 있어서는 중흥운동의 선봉에 섰었다. 이는 시조를 종래의 형식에서 탈피, 현대 자유시(自由詩)와 겨루는 즉 주제와 형식 및 표현을 과감히 혁신시켜 쇠퇴해 가는 시조문학(時調文學)을 바로 세운 선구자이다. 특히 가람은 1928년 ‘시조(時調)와 그 연구’란 글을 발표하고 이 시조가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우리 한국 고유의 문학임을 비교, 논증(論證)하였다. 이 글은 한국현대 명논설로 꼽히고 있다.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꺽이는양을 차마 어찌 ㅂ조리야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 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 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 난초②
   가람은 또한 1921년에는 권덕규(權悳奎), 임경재(任璟宰)와 ‘조선어 연구회’를 발족시키고, 그 간사에 선임되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한글강연회를 갖는 한편 방언(方言), 민속, 민요(民謠) 또는 고문헌(古文獻) 등을 수집했다. 뿐만 아니라 ‘가요연구회’를 조직하고 시조에 관한 논문 등을 발표, 사라져가는 우리의 어문수호(語文守護)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시들어 가는 민족의 얼을 일깨웠던 것이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관으로 편수과장에 취임하여 국문학 교재의 편찬,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이어 서울대 문리대 교수가 되면서는 본격적으로 후진양성과 저작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5.16후에는 전북대 문리대학장에 취임하면서 향토문화 개발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가람은 우리 귀중한 고전(古典)의 장서가로서도 유명하다. 그가 소장했던 고전 중에서 유명한 것으로는 세종대왕 때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비롯, ‘금강경 삼가해’(金剛經三家解) 한중록(恨中錄)등 갖가지 진보적(珍寶的)인 원서를 들 수 있다. 주요한 저서로는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白鐵 공저)의 고전편을 비롯, ‘의유당 일기’(意幽堂日記) ‘요로원 야화기’(要路院夜話記),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 ‘가루지기 타령’ ‘시조의 개설과 창작’ 등 무려 20여종에 달한다. 주요 논문으로는 ‘정읍사(井邑詞)의 고찰’ ‘국문학의 연구’ ‘시조창작론’ 등 그 밖에 수없이 많다.
 
오늘도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내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나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 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 난초③
   또한 술을 좋아하던 ‘인간 가람’은 성품이 호탕한데다가 소탈하기 그지 없었고, 해학을 좋아했다. 국문학자 일석(一石) 이희승(李 熙昇) 박사는 ‘인간 가람’에 대해 “호방불기”(豪放不羈)하고 소탈·담백하여 풍담(諷談)과 해학을 좋아하여 사람을 대하든지 주좌(酒座)에 임했을 적에는 담론이 풍발하여 그야말로 이야기가 냇물과 같이 줄줄 흘러나와 그칠 줄 모르므로 다른 사람에게 개구(開口)의 기회를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람의 독특한 해학과 풍자로 좌중을 매료시키고 폭소를 일으키는 일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강의하던 교실에서도 외설한 이야기를 극히 태연자약한 태도로 엮어 나가는 일이 있어서 학생들로 하여금 포복절도의 경지에 빠지게 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가람이기에 이런 일을 무난하게 치러 넘기던 것이요. 다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도 낼 수 없는 노릇이다. 가람은 이와 동시에 가장 청향(淸香)이 높은 난초와 매화를 즐거이 가꾸어 그 우아함을 감상하는 고상한 취미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또 그는 지독한 술좋아하는 애주가였고…“라는 말을 남겼다.
  이러한 가람은 말년에는 병고(病苦)로 향리인 여산에 내려와 옛집에서 찾아주는 사람없이 외로움에 묻힌 채 고적한 생활을 술로 벗 삼아 보냈다. 그래도 시인 신석정(辛夕汀)을 비롯, 정병욱(鄭炳昱서울대 교수), 김동욱(金東旭연세대 교수), 이능우(李能雨숙명여대 교수), 이태극(李泰極이화여대 교수), 문선규(文璇奎), 최승범(崔勝範)교수(전북대) 등이 이따끔 옛 스승을 찾기도 했다. 
  또 전북지사였던 김인(金仁), 이정우(李玎雨)씨도 가람댁을 방문하고 정중하게 문병을 한 바 있었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몬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뿌리를 서려 주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
받아 사느니라.
                      - 난초④
   이렇듯 국문학계의 거인임에도 6.25 전쟁과 신병으로 말미암아 회갑 또는 고희기념 논문집을 간행하지 못해, 제자들이나 학계에서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1967년 당시 전북지사 이정우(李玎雨), 교육감 김용환(金容煥), 전북일보사장 박용상(朴龍相)씨 등의 뒷받침으로 전북대 문선규(文璇奎), 최승범(崔勝範) 교수와 이치백(李治白전북일보 문화부장) 등이 주동이 되어 ‘가람 李秉岐’박사 頌壽論文集을 서울 삼화인쇄에서 간행 했다.
  집필진은 서울대의 김상기(金庠基) 이숭녕(李崇寧), 이병도(李丙燾), 허웅(許雄), 장사훈(張師勛), 김방한(金芳漢), 차주환(車柱環),이기문(李基文), 그리고, 김윤경(金允經), 김동욱(金東旭), 조지훈(趙芝薰), 남광우(南廣祐),이태극(李泰極), 백철(白鐵), 강신항(姜信沆), 문선규(文璇奎), 최승범(崔勝範), 현평효(玄平孝),정각동(鄭鈺東), 이재수(李在秀), 임헌도(林憲道), 유창균(兪昌均), 김근수(金根洙), 박노춘(朴魯春), 장태진(張泰鎭), 정익섭(丁益燮), 홍순탁(洪淳鐸) 교수 등 27명으로 당시 저명한 전국 각 대학의 국문학 교수를 총망라 했다. 
  당시 이 논문집을 편찰할 때 놀라웠던 것은 청탁받은 집필자가 한 분도 빠짐없이 마감일까지 원고를 보내 주었다는 사실이다.
 
뒤에 오목대를 매양 오르니
허술한 주필각(駐閣)은 외로이 서 있으니
즐비한 몇만 가옥이 내려다 다 보인다.
 
그 옆의 자만동(滋滿洞)은 목조의 고적지요
그 뒤의 발산(鉢山)은  이르노니 발이산(發李山)
과연 그 오백 년 왕기가 여기 결인(結因)하였던가.
                       - 오목대 · 가람 이병기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가람은 ‘삼복’(三福)을 누린 분이라고 한다. 즉, ① 제자 복  ② 난초 복  ③ 술 복 등을 말한다. 또 가람은 서울대학교를 비롯, 도내에서는 전북대학교, 이리공고의 교가 등 전국의 수십개 학교의 교가를 지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한편 가람선생의 장례식은 1968년 12월 3일 선생의 향리인 여산초등학교 교정에서 문화인장으로 치러졌다. 이 때 국사학자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박사가 조사(弔辭)를 했으며, 참석자는 서울대학 교수 때의 제자였던 정병욱(鄭炳昱·서울대교수), 김동욱(金東旭·연세대 교수), 이능우(李能雨·숙명여대 교수), 이태극(李泰極·이화여대 교수), 장덕순(張德順·서울대 교수) 등 지방에서는 시인 신석정(辛夕汀), 문선규(文璇奎·전북대 교수), 최승범(崔勝範·전북대 교수) 등 그 밖에 많은 제자 및 지방인사들이 참석했다.
  
가람의 영 앞에
                              노산  이 은 상
  <내가 가람과 사귄지 50년, 일찍 그의 성격과 생애를 물에다 비겨 말한 일이 있었다.> 
샘 솟아 흐르는 물
여흘 여흘 노래하고
모여서 호수되면
달과 별이 잠겨 놀고
한바다 이루고 나면
호호탕탕 하더니,
  <그는 평소에 난초를 사랑했고, 난초를 노래했고 그래서 그 자신이 난초같은 사람이었다.>
웃음 띤 그 얼굴에
떠 오르던 난초 향기
먼 시골 숨어 있어도
맡아지던 난초 향기
흙 밑에 묻힌다 해도
안 사라질 그 향기
  <일제 말기에 한글학회 사건으로 그와 나는 같은 감방에서 1년동안 같이 났었다.>
같은 방 옥살이에
주고 받던 노랫가락
언제나 그 생각하면
곁에 누운 듯 따습더니
이저녁 목소린 들리는데
사람은 어디로 갔소.
  <그는 제자를 많이 길렀다. 남쪽 고향보다 더 따뜻한 제자들의 가슴속에 길이 깃들 것이다.>
이 겨울 눈이 쌓인들
치운줄이나 아랴마는
남쪽 고향은
땅 속도 혹시 덜 차울는지
그보단 문생들 가슴속에
포근히 안겨 쉬시오.
  <그는 한글학자였다. 국문학자였다. 그리고 술을 즐겼던 시조작가였다.>
접동새 운다 적막하리까
뒷사람들 그 무덤 찾아
다 못 마신 매화주
병채로 기울여 따뤄놓고
시조를 읊으옵거든
웃고 들으시구려.                   (1968.12.1. 조선일보)
  
가람은 가시고
                                     이 태 극 (李泰極)
 
우리의 얼과 넋이 그토록 복바치어
평생을 그 가락으로 부름 가르치더니
그여히 말씀도 없이 떠나시고 마셨다.
 
계동(桂洞) 골방에서 호담겹던 그 모습
수우재(守愚齋) 모정에서 반기시던 그 웃음
지금도 쟁쟁 암암한채 가슴만이 조이오.
 
그 무슨 업죄있어 말과 붓을 아겼셨소
만권 서적은 이미 길이 맡기시고
홀가분 가시는 길에 흰자락이 보이오.
누구나가 가는 길을 외오 갈 수 있겠소만
앉아만 계신대도 기둥마냥 믿쁘더니
어린양 길을 잃은 듯 허공만이 처다뵈오
 
그래도 뿌린 씨앗 방방곡곡 자라가오
꽃도 피고 열매지어 가람가의 숲이라오
넘치게 드리는 두견주로 고이고이 잠드소서
                              (장례식장에서·1968.12.3. 全北日報)
      
“詩作과 교단의 78년”
1962.12.1. 동아일보
   당시 가람선생의 서거에 전국의 각 신문이 크게 보도했다. 여기에 동아일보(1968.12.1.)의 보도 내용을 싣는다.
   『… 종이 한 장으로 우주(宇宙)를 가렸지만… 그러나 나의 임종도 네 앞에서 하려한다』고 ‘창’(窓)을 읊다. 정말 그 창호지 앞에서 별세한 국문학의 석학 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 박사는 1892년 전북 여산에서 출생. 한성사범과 조선어강습원을 졸업하고 17세 때 ‘음빙실 문집(飮氷室文集)을 우리 말로 표현함으로써 시조(時調)를 짓기 시작했다.
  동광 휘문고보(高普)교사 등에서 교편을 잡던중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검(被檢), 1년만에 석방된 적이 있는 가람선생은 1923년 이후로 시조와 논문, 수필 등을 ‘조선문단’에 수다히 발표하여 황무지였던 한국고전문학과 시조의 초기 개척자가 되었다.
  해방이 되자 미 군정청 편수국 편수과장을 거쳐 서울대 문리대의 국문학 고전부문을 도맡았고 1953년 전북대 문리대학장과 56년 중앙대학 교수 등을 거쳐 한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1963년 5월, 평생을 모아 가다듬고 정리한 국문학 관계 도서 4천여권을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기증해서 ‘가람문고’를 설치한 이 박사의 자작 저술로는 ‘가람 시조집’ ‘역대시조선’ ‘恨中錄’ ‘要路院夜話’ ‘近朝內簡選’ 등 다수이다.
※ 이밖에도 全北日報,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 전국 각 신문에서 크게 보도했다. 추도사로 李熙昇(국어학자 성균관 대학원장·동아일보) 李崇寧(서울大 교수·한국일보) 金東旭(연세대 교수·중앙일보) 金相沃(시조작가·신아일보) 張德鎭(서울대 교수·조선일보) 씨 등이 중앙 각 신문에 발표했음.
  
哭 가람 선생
辛 夕 汀 <시인>   1968년 11월 29일은 우리 정신사(精神史)에 참을 수 없는 비극을 몰고 온 날이다. 그것은 우리 국문학의 지평선 위에 눈부시게 빛나던 <가람>이란 별이 이날 새벽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가람선생의 업적은 바로 우리에 또 하나의 슬픔과 어둠을 안겨 주었다. 선생의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끼친 공적을 새삼 나열한다는 것은 오히려 부질없는 속된 예의일 것이요, 이 나라 고전의 발굴에서 비롯한 주석(註釋)과 평론에 이르기까지 무비주옥(無比珠玉)이 아닐 수 없으니, 선생은 국문학도의 앞길을 밝히는 영원한 등불로 빛날 것이다.
  선생이 국문학사에 세우신 드높은 봉우리는 의연히 솟구쳐 그 지맥(支脈)을 헤아릴 수 없으나 차라리 선생은 국문학자이기 전에 천생의 시인으로 오늘날 시조(時調)를 세워 신조(新調)로 정형(整形)한 새 가락은 선생의 이론과 작품에서 그 남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 나라 시조시단(時調詩壇)에서 무수히 빛을 던지면서 있는 젊은 시조시인들이 모두 가람 성좌(星座)를 운행하는 별들이니, 선생의 온후하신 성용(聲容)에 접할 길 없는 것을 호곡(號哭)으로 메꿀 수 있으랴.
 
풍란(風蘭)이 바야흐로 벌어졌습니다.
방렬청아(芳烈淸雅)한 향(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난대밀림(暖帶密林) 속에나 앉았는 듯 합니다.
틈나시거든 왕림하시압.
   선생이 생전에 보내신 글발이다.
  아마 어느 해 늦은 봄이었다고 기억된다. 글월을 받던 바로 선생을 찾았고, 그날 선생과 더불어 두견주(杜鵑酒)를 기울이며 좀체 틈을 주지 않는 선생의 장광설(長廣舌)을 경청하던 것이 어제런 듯 선하다.
  봄이 지나면 바로 뒤이어 연엽주(蓮葉酒)의 계절이 선생을 찾아온다. 이때쯤 되면 풍란도 이울고 뜰에 백련(白蓮)이 소담하게 피어 그윽한 향기가 솔곳이 들려오는 오목대 아래 양사재(養士齋) 서재에는 선생의 지기와 제자들이 둘러앉아 호방한 선생의 웃음소리 속에 연엽주 잔이 오고 가기 마련이다.
  고매(古梅)처럼 허울다 떨어져 버린 그 고매한 풍모에 어울리는 담소에서 풍겨오는 선생의 담담하면서도 뜨거운 인간애를 어찌 한 두 송이 매화꽃 봉오리에만 비기랴.
  청지빛 하늘이 오목대를 넘어가는 가을철이면 양사재에는 또다시 국화주의 향기가 드높은 시절이 오는 것이다. 이에 앞서 포광(包光) 선생과 더불어 국화주를 기울이면 오고가는 이야기는 그대로 속진(俗塵)을 떠난 청담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호방하고 무애한 기질을 그 애주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애란(愛蘭), 애서(愛書)에서는 지극히 섬세한 성품의 일면을 볼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이 상반된 성격의 조화에서 선생의 주옥같은 시조의 가락이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오늘도 온종일 두고 비가 줄줄 내린다
꽃이 지면 蘭草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 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주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난초·3)
   이 난초에도 선생의 그 섬세한 마음을 우리는 역력히 읽을 수 있다. 유명을 달리한 이날 국화주에 담았던 그 호방한 웃음소리도 장강(長江)처럼 그칠 줄 모르던 장광설도 들을 길이 없으니 빈 가슴은 메울 길 없을진저!
  항상 속무(俗務)에 얽히고 쫓겨 선생을 자주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할 뿐, 다만 선생이 남기신 학문과 인격을 받들어 어둔 앞길을 밝힐 것을 다짐하고 삼가 분향 합장으로 선생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196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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