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해온 것은 전국 법원 직원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 점입니다, 나는 모든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은 영광이며 또 그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명예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가 1957년 12월 16일 퇴임식에서 한 말이다. 그는 퇴임사에서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최대의 명예 손상이 될 것이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재임 기간 김병로는 후배 법관들에게 청빈한 삶과 올곧은 정신을 강조했다.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동을 삼간다는 의미의 '계구신독(戒懼愼獨)'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3일은 우리나라 사법의 기틀을 잡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세운 김병로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는 1964년 이날 인현동 자택에서 간염으로 별세했다. 사회장이 치러진 시청 앞 광장에서 우이동 묘소에 이르는 길가에는 혹한도 잊은 채 수만 명의 시민이 장례행렬을 지켜봤다. 그의 영구는 이준 열사 왼편에 묻혔다. 

 
김병로는 1887년 12월 15일 전라북도 순창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다 1904년 무렵 우연한 기회에 목포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군함과 화륜선을 보고 서구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친구 4~5명과 함께 담양에 일신학교라는 간판을 걸고 강사를 초청하여 영어, 일어, 산수 등 신학문을 배웠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5월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김병로는 이에 가담했다. 최익현 부대가 해산되자 다시 김동신 의병부대에 합류, 순창의 일본인 관청을 습격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압으로 의병투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김병로는 계몽운동, 자강운동에 눈을 돌렸다. 1906년 고정주가 설립한 담양 창평의 창흥의숙 고등과 속성과정에 들어갔다.

김병로는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법학과 청강생이 됐다. 메이지대학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에 다녔다. 당시 인력거를 끌며 공부를 하느라 과로로 폐결핵이 생겼다. 귀국하여 건강을 되찾고 잡화상을 운영하며 경비를 마련, 2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3학년에 편입했다.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메이지대학과 주오대학 공동운영 법률고등연구과에 들어갔다.

김병로는 일본인 이외에는 변호사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없다는 내각회의 결정에 따라 일본 변호사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1915년 7월 귀국했다. 경성전수학교 조교수와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성전문학교 전신) 강사로 강의하다가 1919년 4월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로 임관했다. 그러나 1년 만에 사임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서대문 자택에서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가 변호사가 되고자 한 것은 "첫째, 아무리 일본 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둘째,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고, 셋째, 공개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훗날 회고했다.

그는 1923년 허헌, 이인, 김태영 등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했다. 한 사람이 사건을 맡으면 그 보수로 다른 회원들과 공동으로 연구하여 변론한다는 취지였다. 일반 형사사건을 맡아 받은 수임료로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론하고 사식을 차입했으며 그 가족들을 돌보기도 했다.

김병로가 맡았던 대표적인 '시국사건'으로는 김상옥 의거, 의열단 사건, 6ㆍ10만세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고려혁명당 사건, 간도공산당 사건, 대구학생비밀결사 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등이 있다.

그는 1927년 창립된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으나 결국 신간회는 해체됐다. 

김병로는 1931년 6개월 동안 변호사 정직처분을 받는 등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은둔했다. 패망이 임박한 일제가 민족지도자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가평으로 피신했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되자 김병로는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건국운동에 투신했다.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민정당과 국민의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냈다. 1946년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기초위원회 위원, 미군정청 사법부장, 1947년 사법부 내 6인 헌법 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8월 5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됐으며,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로 정년퇴임을 했다.

대법원장으로서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이 되어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을 때 이를 거부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골수염으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병로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는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1954년 이승만 정부가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하자 "절차를 밟아 개정된 법률이라도 내용이 헌법 정신에 위배되면 입법부의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서민호 의원 살해 기도 사건'을 둘러싼 이승만 전 대통령과의 마찰은 유명하다. 이 전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서민호 의원이 1952년 자신을 살해하려 한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한 혐의로 기소되자 당시 1심을 맡은 부산지법 재판부는 정당방위에 해당한다며 서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전 대통령이 "현역장교를 권총으로 쏴 죽였는데 무죄라니 될 말인가"라며 판결을 비난하자 김병로는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 없다. 무죄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지 않는가"라며 굽히지 않았다.

퇴임 후 재야 법조인이 되어서도 정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1958년 2월 법관회의의 제청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곧바로 대법원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하자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법사위에서 통과된 것을 규탄했다. 이 개정안은 본회의에는 상정되지 않았다. 4·19혁명 당시 재야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사태 수습을 위한 대정부 건의안을 발표했으며,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을 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는 형법, 형사소송법, 민법의 골격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조문을 직접 작성했다. 


'가인'은 말 그대로 '거리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거리의 사람에 불과하다며 직접 붙인 것이다. 

김병로는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한 성품을 가졌다. 한국전쟁 중 부인이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되는 개인적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대법원장실에서 두꺼운 이불을 몸에 두르고 판결문을 썼으며, 가까운 사이라도 재판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면 매몰차게 내쫓았다고 한다. 박봉에 시달리던 시골 판사가 사표를 내자 "나도 죽을 먹으며 산다. 함께 참고 고생해 보자"고 만류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최근 사법부는 법원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일선 재판 중심의 사법행정 구현과 수평적 조직문화로의 전환을 기본 방향으로 제시했다. 외풍과 압력으로부터 법관의 독립을 이루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중립적인 기구를 만들고 법관 인사제도를 개선하겠다는 방침이다. 정치적 이유로 재판 결과를 비난하는 행태도 강하게 비판했다. 사법부 내부의 법관 독립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당시의 사법환경과 지금의 사법환경은 물론 다르다. 그러나 그 기본 정신은 같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의 신뢰를 얻고 '좋은 재판,' '좋은 법원'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된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라는 화두는 여전히 남아있다. 대법원이 의욕적으로 혁신의 새로운 기틀을 다지려고 하는 지금,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생애와 그가 남긴 교훈이 새삼 떠오른다.

/김은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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