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상춘 군의 '기로'보다도 김명순 여사의 '의심의 소녀'는 가장 이 점에 있어서는 특출하외다. 거기는 교훈 같은 흔적은 조금도 없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자미있고, 또 그 자미가 결코 비열한 자미가 아니오, 고상한 자미외다."

1917년 월간 종합지 '청춘' 11월호의 문예작품 현상공모에 18세 소녀 김명순이 응모한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입선했다. 윗글은 이에 대한 춘원 이광수의 심사평이다.

100년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공식적으로 등단했다. 최초의 근대 여성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여성이 문필활동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여성이, 그것도 문학계를 이끌고 있던 최남선이 창간한 '청춘'에서, 소설가로 이름을 떨치던 이광수에 의해 발탁됐다는 사실은 엄청난 일이었다.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이광수는 이 작품에 대해 "첫째, 시문체에 의한 언문일치, 둘째, 문학에 대한 비 유희적인 엄숙한 태도, 셋째, 권선징악을 초월한 현실묘사, 넷째, 비현실적인 관념사고를 배제한 현실의 재현, 다섯째, 근대사상의 반영" 등을 높이 평가했다고 밝혔다.

'의심의 소녀'는 전통적인 결혼생활 속에서 한 여성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평양 대동강 동안을 2리쯤 들어가면 새마을이라는 동리가 있다. 그 동리는 그리 적지는 않다. 그리고 동리의 인물이든지 가옥이 결코 비루치도 않으며 업은 대개 농사다. 이 동리에는 '범네'라 하는 꽃인가 의심할만하게 몹시 어여쁘고 범이라는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 지극히 온순한 8, 9세의 소녀가 있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등장인물의 사연이 밝혀지는 과정이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문장도 구어 투를 완전히 벗어난 현대문이다. 

김명순은 1896년 1월 20일 평양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부유한 지주이며 관료였으나 모친이 기생 출신 소실이라서 '기생의 딸'이라는 편견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3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했다. 1905년 기독교 계통의 평양 야소교학교로 전학해 1907년 졸업하고 1911년 서울 진명여학교에 들어갔다.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의 국정여학교에 편입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1915년 7월, 데이트 폭력을 당하고 학교 연못에 몸을 던지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짝사랑 상대에게 실연당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국내 언론에 과장 보도되어(매일신보 1915. 7. 30) 김명순은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성폭행의 빌미를 제공한 '방종하고 타락한 여자'로 받아들여졌고, 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1916년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17년 3월에 졸업했다. 1917년 단편소설이 당선되고 그 후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으로 유학, 1919년 도쿄여자전문학교에 들어갔다.

도쿄유학 시절인 1919년 소설가 전영택의 소개로 '창조'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로 활약했다. 1921년부터 잡지 '개벽'에 시와 소설을 발표했으며,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상봉'을 번역하기도 했고, 다른 작가의 작품에 대한 평론을 쓰기도 했다. 1923년부터는 동아일보, 개벽, '신여성' 등에 고정 필진으로 활동했다. 1924년 조선일보에 소설 '돌아다 볼 때,' '탄실이와 주영이'를 연재했다. 

1925년 매일신보의 여기자 공채에 합격하여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김명순은 소설 21편과 시 107편, 희곡 3편, 수필과 평론 18편, 번역 시, 소설 등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칠면조(1921),' '꿈 묻는 날 밤(1925),' '나는 사랑한다(1926),' '모르는 사람같이(1929)' 등이 있으며, 시로는 '동경(1922),' '언니 오시는 길(1925),' '석공의 노래(1934),' '시로 쓴 반생기(1938)' 등이 있다. 1925년 여성작가로는 처음으로 창작집 '생명의 과실'을 간행해 주목을 받았다. 2016년에는 그동안 미완성 작품으로 알려졌던 단편소설 '선례'가 발굴되기도 했다. 

영화배우로도 활약해 안종화 감독의 '꽃장사(1930),' '노래하는 시절(1930)' 등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1939년 도쿄로 건너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으로 도쿄 야오야마뇌병원에 수용됐다가 1951년 6월 22일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명순의 소설은 주로 신여성인 여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현실적이고 치밀하게 묘사했다.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선구자로서 신여성의 의식구조를 보여준다.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 연정, 추억 등을 노래했다. 당시 문단은 계몽적 성격이 강했는데 김명순 작품의 개인주의적이고 예술 지향적인 성격은 비판의 표적이 됐다. 남성 문인들은 김명순의 작품뿐 아니라 출생 배경 등에 대한 악의적인 인신공격성 비난까지 서슴지 않았고, 지독한 추문이 그를 따라다녔다. 

김명순과 함께 '창조'의 동인이었던 김동인은 1939년 3월 '문장' 2집에 문란한 신여성을 풍자적으로 그린 '김연실 전'을 연재했다. 이 소설은 5월 '선구녀,' 1941년 2월 '진주름'이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발표됐다. 자유연애를 선각자의 표식으로 여기고 도덕적으로 타락해 무절제한 생활로 파멸해가는 여성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그린 이 작품에서 앞뒤 정황상 주인공 김연실의 실제 모델이 김명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명순은 신문에 반박문을 내고 자신을 모독한 사람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등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김연실 전'이 연재되기 시작하자 탈진한 그는 외로운 싸움을 접고 일본으로 떠났다. 

김명순 사후에도 남성 작가들의 비판은 계속됐다. 전영택은 '현대문학' 1963년 2월호에 쓴 '내가 아는 탄실 김명순'에서 김명순의 삶을 "변태적인 방종의 생활"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김명순은 변변한 작품 한 편을 남기지 못하고 마지막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구걸을 해서 연명하다가" 간 불행한 시인이라 단정을 내렸다. 


김명순은 남성 중심의 문단에서 꿋꿋하게 문학으로 대항했다. 피해자였지만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작품을 통해 여성을 차별하는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기하지 못했다.

김명순은 자유연애론자이기보다는 오히려 성적으로 보수적이었으며 여성에 대한 과도한 편견이 존재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오해와 소문의 희생양이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문학 외적인 스캔들에 가려 김명순이 작품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신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이었으며, 공식적으로 등단한 최초의 여성작가였다. 그러나 선구적 문인으로도, 대표적인 근대 여성작가로도 대우받지 못했다. 김명순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에는 김명순의 등단 100주년을 맞아 그를 조명하는 학술심포지엄 '다시 살아나라, 김명순!'이 '문학의 집 서울'에서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오는 4월 1일까지 계속되는 '신여성 도착하다'전에는 김명순을 재조명하는 작품들이 다양한 사료와 함께 전시되고 있다. 

모든 방면에서 남성이 주류였던 시대, 남녀가 결코 평등하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던 김명순. 그녀가 고통을 겪은 것은 100여 년 전이다. 그러나 선진국이라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미투(Me too) 캠페인'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여성들이 겪는 고통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물며 우리 사회는 말할 것도 없다.

/김은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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