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우리나라 최동단 독도의 동도 선착장 인근 해안에 영토표석이 세워졌다. 

높이 111㎝, 폭 63㎝ 화강석에 세로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지표'라고 한자로 새겨진 이 표석은 한국전쟁 직후 혼란했던 시기 일본인들의 독도 침범으로부터 독도를 수호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상징이다. 이를 시작으로 정부는 차례차례 독도 영유국으로서의 조처를 했다. 같은 해 8월 15일 독도 등대를 점등했으며, 9월 15일에는 우정국에서 3종의 독도 우표를 발행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는 한국 소유로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노골적으로 독도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18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 일명 '이승만 라인'을 관보(국무원 고시 제14호)에 실어 공포했다. '이승만 라인'은 정부가 '한일 양국의 평화유지에 목적이 있다'고 명분을 밝혀 평화선이라 불렸다. 독도는 이 선 안쪽에 포함돼있다. 평화선은 한반도 주변수역 50~100해리 범위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설정한 것으로, 한일 간 어업의 격차를 고려하고, 어업자원 및 대륙붕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맥아더 라인' 철폐에 대한 보완책의 일환이었다. 1945년 9월 미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 주변에 선포한 해역선인 '맥아더 라인'은 일본인의 어로 활동범위를 제한하는 선으로, 1952년 4월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대일강화조약, 일명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폐지됐다. 

이승만 정부는 평화선을 국내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953년 어업자원보호법을 제정, 평화선 내 외국선박의 불법어로행위를 엄격히 단속했다. 당시 일본 선박 313척이 나포됐다. 이 중 126척만 송환됐고 나머지 185척은 압류됐다. 평화선은 한일협정에서 우리측의 중요한 전략적 자원으로 활용됐으나, 1965년 6월 한일국교 정상화로 사실상 철폐됐다.

 
 

1953년 5월부터 일본 선박들의 독도 출항이 본격화됐다. 일본은 그해 6월 25일과 27일, 28일 3회에 걸쳐 독도에 상륙해 우리 어부들의 위령비를 파괴하고, 독도에 일본 영토 표시를 감행했다. 한국 정부는 1954년 5월 18일 일본인들이 만들어놓은 표지판을 철거했다. 이어 동도 남동쪽 절벽 바위에 '한국령'이라는 글자와 태극 조각,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라는 주소를 넣어 대한민국 영토 표식을 새겼다. 

일본의 독도 침범이 빈번해지자 우리 국회는 1953년 7월 8일 결의문을 채택, 독도를 지키기로 결의하고 경비대를 상주시키기로 했다. 

앞서 1953년 4월에는 울릉도 주민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가 창설됐다. 

당시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 문제를 제소할 것을 제의했으나 한국은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실효적으로 한국의 영토"라며 제소할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1953년 9월 17일 수산시험관을 포함한 일본 관리들을 태운 일본 수산시험청 소속 선박 한 척이 독도에 상륙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외교적으로 힘이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이 손쉽게 독도를 오갈 수 있었다.

1954년 11월 21일 일본 순시선 한 척이 독도로 접근하다 독도의용수비대로부터 약 10여 분간 600여 발의 총탄 세례를 받고서 물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도 등대가 무인등대로 첫 불을 밝혔다.

독도 등대는 1967년 7월 8일 등탑을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고쳤다가 1998년 12월 광력을 증강하고 유인등대로 재건축됐다. 현재 독도의 동도 봉우리 부근에 있는 이 등대는 높이 15m의 백색 원형 콘크리트 구조물, 등탑 1개소, 사무실, 동력실, 축전지실, 창고 등의 시설로 구성됐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6년 12월 30일 경찰에 독도 경비를 인계할 때까지 독도를 지켰다. 
 

일본은 1951년 9월 8일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일본이 권리를 포기해야 할 한반도 소속 섬으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을 명시하고 있으나, 독도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시마네 현으로 편입하고, 편입한 날을 기념해 2005년부터 2월 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지정해 행사를 하고 있다.

또한, 2008년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2014년 중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명시해 현재 초중고등학교 사회 교과서 대부분에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다. 지난해 3월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초중학교 새 학습지도요령은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이며 한국이 이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주장을 초중학교 교과서와 교사 지도지침에 싣도록 하고 있다. 새 학습지도요령은 "다케시마와 북방영토, 센카쿠열도가 일본 고유 영토라는 점을 언급할 것"이라고 명시하고, 독도와 북방영토에 대해서는 "한국과 러시아에 의해 불법 점거돼 있다는 점과 독도에 대해서는 한국에 반복해서 항의하고 있다는 점" 등을 포함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때인 2005년 이후 한 해도 빠짐없이 방위백서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지난해 8월 8일 각의를 열어 전년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일본) 고유의 영토인 북방영토(쿠릴 4개 섬)와 다케시마의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된 채로 존재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담긴 2017년 판 방위백서를 의결하고 공식 발표했다. 

2017년 판에도 전년 판과 마찬가지로 지도에 다케시마라는 표기를 넣고 있다. '우리나라(일본) 주변 해·공역에서의 경계감시 이미지'에서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여 일본의 영해와 배타적 경제 수역(EEZ) 안에 넣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지증왕 재위 기간이었던 512년 하슬라주(강릉 지역)의 군주인 이사부의 군대가 울릉도와 독도 및 주변 섬들을 포함하는 우산국을 정벌했다.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키면서 독도는 처음으로 한국 영토로 편입됐고, 이후 우리 민족이 실효적으로 지배해왔다.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과 지도에는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우산국을 이루었던 섬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어했다가 일본 어선을 발견, 이를 문책하고 일본까지 찾아가서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시키고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1900년 10월 25일 고종은 독도를 울릉도 부속 섬으로 정하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제정, 독도 영유권을 확인하고 이틀 후 이를 관보를 통해 대내외에 공표했다. 이날을 기념해 2010년에 10월 25일을 '독도의 날'로 선포했다. 

그러나 1904년 러일 전쟁 중 일본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기 시작, 영유권 분쟁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2018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 해돋이는 동해의 독도에서 시작된다. 일제강점기에 빼앗겼던 것을 제외하면 우리 민족이 1천500년 넘게 지켜온 땅이다. 신라 장군 이사부부터 조선 시대 안용복, 독도의용수비대, 오늘날 외딴 섬 독도를 지키는 경비대와 '등대지기' 등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독도를 우리 영토이게 했다. 영유권을 둘러싼 지루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올해도 일본의 공세는 이어질 것이다.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독도의 영토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이 싸움을 치러내야 한다. 독도의 일출을 바라보며 독도 수호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김은주 언론인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