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같이 사랑하라 하였거니와 가족으로서 제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하여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하여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1919년 9월 김마리아가 작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취지서의 일부이다.

3.1운동 하면 우리는 바로 유관순을 떠올린다. 그러나 김마리아 역시 3.1운동의 불길을 댕긴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3월 13일은 김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는 2.8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해방을 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날 눈을 감았다. 
 

김마리아는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 소래에서 출생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대지주였던 부친은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1895년 부친이 설립한 소래학교에 입학, 1901년 졸업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기거하며 이듬해 정신여학교(연동여학교)에 들어갔다. 삼촌의 집에는 김규식, 노백린, 안창호,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았다. 소녀 시절 김마리아는 이들을 보며 조국애를 키워 나갔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13년 정신여학교로 전근해 수학을 가르치다가 다음 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마리아는 히로시마의 여학교를 거쳐 1915년 도쿄 메지로여자학원 전문부에 입학했다. 1918년 말 황에스터 등과 도쿄 유학생독립단에 가담했고, 이어 2·8 독립운동 준비에 들어갔다. 여자 유학생들은 성금을 거둬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고, 당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 참석했다. 김마리아는 다른 유학생 수십 명과 경시청에 연행됐다가 풀려났다.

/김은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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