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조 없는 예술가들이여, 너의 연기(演技)를 불사르라. 너의 연기는 독부(毒婦)의 미소 섞인 술잔이다. 부정에 반항할 줄 모르는 작가들이여, 너의 붓을 꺾어라. 너희들에게 더 바랄 것이 없노라. 양의 가죽을 쓴 이리떼 같은 교육자들이여, 토필을 던지고 관헌의 제복으로 갈아입거나 정당인(政黨人)의 탈을 쓰고 나서라. 너희들에게는 일제시대의 노예근성이 뿌리 깊이 서리어 있느니라. 지식을 팔아 영달을 꿈꾸는 학자들이여, 진리의 곡성(哭聲)은 너희들에게 반역자란 낙인을 찍으리라…"  

4·19 혁명 직전에 발행된 종합월간지 '사상계' 창간 7주년 기념호(1960년 4월호) 권두언의 일부이다. 발행인 장준하가 쓴 이 글은 집권당의 횡포가 극심한 가운데 공명과 영달을 좇는 일부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꾸짖고 있다. 7주년 기념호는 362쪽 부피로 9만7천 부를 찍었다고 하니 당시 우리나라 잡지 역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장준하가 사재를 털어 만든 사상계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양심세력을 대변하는 잡지로 받아들여졌으며, 사상적 자양으로 지식인과 학생들에게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상계는 65년 전 1953년 4월 1일 창간됐다. 창간호의 판권장을 보면, 편집인 겸 발행인 장준하, 발행소 사상계 사(서울 충무로 2가 100, 부산 대교로 3가 71)로 되어 있다. 창간호부터 11월호(제7호)까지는 부산에서 발행했고 12월호부터는 서울로 옮겨와서 냈다.

1952년 4월 피난 수도 부산에서 당시 백낙준 문교부 장관이 혼란한 국민정신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국민사상연구원을 만들고, 그해 9월 기관지로 '사상'을 창간했다. 이 연구원의 기획과장으로 '사상'을 편집했던 사람이 장준하이다. '사상'은 12월 제4호를 내고 폐간했다. 장준하가 이를 인수하여 제호를 사상계로 바꾸고 본격적인 종합교양지로 출발했다.
 
창간호 3천 부는 발간과 동시에 매진됐다. 장준하 부부는 창간호를 리어카에 싣고 직접 끌고 밀면서 서점에 배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A 5판 100면 내외로 발행되다가 400면 내외로 증면됐다.

민족통일문제, 민주사상의 함양,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창조,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을 편집의 기본 방향으로 삼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학, 철학,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권위 있는 글을 실었다. 사상 및 문예 면에 비중을 두어 신인문학상, 동인문학상, 사상계논문상, 사상계번역상 등을 제정,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 연장, 한일회담, 베트남파병 등을 반대하고 부정부패를 비판했다. 1960년을 전후해서 판매 부수가 5만~8만 부에 이르며 전성기를 맞았다. 
 
사상계는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논쟁의 장소를 제공했다. 학계의 관심을 끈 첫 논쟁은 1954년 6월호에 한글학자 허웅이 발표한 '현행철자법 개정론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이었다.

이후 황산덕 대 백남억, 현승종 대 유진오, 함석헌 대 윤형중의 논쟁 등은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자유언론투쟁에 앞장섬으로써 1962년에는 장준하가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받기도 했다.

사상계는 제3공화국 당시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논조의 정치평론을 자주 실으면서 탄압을 받았다. 
 
1958년 8월호에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발표됐다. 서울시경은 함석헌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발행인 장준하와 주간 안병욱도 조사를 받았다. 사상계의 첫 번째 필화였다. 

장준하는 1967년 6·8 국회의원 선거에 옥중 출마하여 당선됐다. '국회의원 겸직 금지조항'에 해당해 사상계 발행인 자리를 사상계 편집위원이던 부완혁에게 넘겼다. 사상계는 1968년 2월호 통권 제177호부터 부완혁 명의로 발행됐다. 

재정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1970년 5월호에 실은 김지하의 담시 '오적'으로 사상계는 폐간됐다. 발행인 부완혁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사상계는 9월 29일 당국으로부터 폐간 처분을 받아 통권 205호로 종간됐다. 

부완혁은 2년여의 법정투쟁을 통해 1972년 4월 대법원에서 등록취소처분 취소판결을 받아내 형식상으로는 '폐간'이 아니라 '휴간' 상태로 만들었다. 그러나 잡지를 유지할 자금이 부족한 데다 필자를 구하기가 힘들었고, 위험을 감수하고 인쇄를 해줄 인쇄소를 찾기도 어려웠다. 

1984년 부완혁이 사망하자 장녀 부정애가 판권을 상속, 몇 차례 복간을 시도하다가 28년 만에 1998년 6월호(통권 206호)가 발간됐다. 이후 2000년 6월호(통권 207호)가 나왔다.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등산길에서 의문의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유신정권은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정권에 의한 타살이라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장준하는 1915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대관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다니다 교사였던 부친의 전근으로 신성중학교로 전학했다.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1938년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1941년 도쿄로 건너갔다.
 
일본 도요대학 예과를 거쳐 도쿄의 니혼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944년 일본군 학도병에 강제 징집됐다. 중국 장쑤 성 쉬저우 지구에 배속됐으나 6개월 만에 탈출해 김준엽의 도움으로 중국 중앙군관학교 린취안 분교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 입대했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필사본 잡지 '등불'을 발간했다. 험준한 겨울 산을 넘어 1945년 1월 31일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해 4월 시안의 한국광복군 제2 지대 이범석 휘하에 배속됐다. 미국 전략사무국(OSS)이 주관하는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국내 후방 잠입작전에 투입됐다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귀환했다.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편으로 귀국하여 김구 주석의 수행 비서로 활동했다. 1948년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하는 한편 1949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했다.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사상계를 창간했다.
장준하는 1966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검거돼 복역했다. 이듬해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옥중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으로 복귀했으며, 1973년 통일당 최고위원이 됐다. 1974년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참가하여 10여 차례 투옥됐다. 1975년에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시이동면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망경위를 조사했으나 2004년 공권력 행사에 의한 사망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012년 8월 묘소 석축이 무너져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다시 의혹이 제기됐다.
장준하 기념사업회는 장준하 암살 의혹 규명 국민대책위원회를 꾸려 진상 조사에 착수했고 이정빈 서울대 법의학 명예 교수팀에 유골 정밀감식을 의뢰, 2013년 3월 26일 " 머리 가격에 의해 숨진 뒤 추락했다" 는 결과를 발표했다. 

사상계는 1950년대와 60년대 계몽적 자유민주주의에 기초를 두고 이승만, 박정희 시대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학생과 지식인에게 영향력이 큰 잡지로 성장했으며 학계와 문화계를 이끌었고 수많은 문필가를 배출한 공적을 남겼다. 당시로써는 최장수 지력을 기록했다. 
엄혹한 시절, 사상계는 등불이었다. 한 권의 잡지가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회갈등이 크고 가치관의 혼란이 심한 지금, 사상계 같은 잡지의 존재가 아쉽다.

/김은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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