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의인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의인
  • 이희용
  • 승인 2018.04.1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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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오후 서울 중랑구 망우리묘지공원 203363호 묘소 앞에 양복 정장 차림의 노신사 20명가량이 모였다. 무덤 뒤로 태극기와 일장기가 그려진 플래카드도 내걸렸고 양옆에 조화도 서 있었다. 무덤 주인공은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로 그의 87주기를 맞아 추모식이 진행된 것이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현창회가 일본의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추모회와 합동으로 개최한 이날 추모식은 다쿠미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를 기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93세의 조만제 현창회장과 지노 쓰네오(千野恒郞) 추모회장 등 양국 회원과 시민 등이 참석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과연 누구이기에 9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양국 사람들의 추모를 받고 있고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또 어떤 인물일까. 

 

다쿠미는 1891년 야마나시(山梨)현 호쿠토(北杜)시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1913년부터 서울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7살 위의 형 노리타카가 "우리가 듣던 것과 달리 조선이 살기 좋은 곳"이라며 함께 지낼 것을 권유하자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영림서(營林署)에서 일하던 다쿠미도 이듬해 5월 서울로 이주, 조선총독부 산하 임업시험소에 취직했다. 그는 조선에서 눈을 감기까지 17년 동안 낙엽송 양묘에 성공하고 잣나무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을 개발하는 등 우리나라 산림녹화에 크게 기여했다. 현재 인공림의 37%가 그의 도움으로 조성됐다고 한다.

아사카와 형제는 한국 공예의 아름다움을 맨 먼저 발견한 일본인으로 꼽힌다. 노리타카는 조선 도자기에 관한 여러 편의 저서와 논문을 쓰고 전국의 도요지 678곳을 찾아내 '조선 도자기의 신(神)'이란 별명을 얻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게 청화백자추초문각호(靑花白磁秋草紋角壺)를 선물해 그가 한국 문화와 예술에 빠져들게 한 것도 노리타카였다. 다쿠미도 명저 '조선의 소반'과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를 남겼다. 둘은 야나기와 의기투합해 전시품을 수집하고 후원자를 모집해 1924년 4월 9일 경복궁 집경당에 아시아 최초의 공예미술관인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노리타카는 조각과 회화 작가로 입문해 조선미술전 등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으며 시도 수백 편 남겼다. 도자기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아 한국 도자사를 집대성하는 업적을 쌓았다. 그는 1945년 일본 패망 후에도 미국 군정청의 특별허가로 한국에 남아 도요지 조사를 계속하다가 공예품 3천여 점과 도편(陶片) 30상자를 조선민족미술관의 후신인 국립민족박물관에 기증하고 1946년 11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1964년 1월 8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국립민족박물관은 195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돼 그의 기증품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이들의 조선 예술 사랑은 말 그대로 난형난제(難兄難弟)였지만 조선인과 하나가 되려는 마음은 동생이 더 깊었다. 다쿠미는 바지저고리 차림에 망건을 쓰고 외출하는가 하면 한국어를 쓰고 한국 음식을 지어 먹었다. 술도 막걸리를 즐겨 마셨고 거처는 온돌방이었으며 방안에 조선 장롱을 두고 살았다. 넉넉지 않은 형편인데도 어려운 이를 보면 주머니를 털었고 고학생들에게 정기적으로 장학금도 주었다. 야나기도 "다쿠미만큼 조선 예술을 알고 조선 역사에 통달한 사람이 있겠지만 그처럼 조선인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들과 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평했다. 

 

그는 1931년 4월 2일 과로에 따른 급성폐렴으로 순직하며 "나는 죽어도 조선에 있을 것이니 조선식으로 장례를 지내 달라"고 유언했다. 불과 40세였다. 다쿠미가 이문리(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안장되던 날 조문객이 구름처럼 모였고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나섰다. 이문리 묘소는 1942년 7월 새로 길이 나는 바람에 망우리로 옮겨졌다. 해방 후 돌보는 이가 없어 덤불에 덮이고 묘비도 넘어져 뒹굴다가 이를 안타깝게 여긴 임업시험장 동료들이 1964년 6월 새로 단장했다. 임업시험장 직원들은 1984년 8월에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 

일본에서는 다쿠미의 일대기를 그린 책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1984년)과 '백자 같은 사람'(1994년)에 이어 영화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까지 선보였으나 한국에서는 그의 이름이 차츰 잊혀갔다. 그러던 중 2001년 일본 유학생 이수현 씨가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나 일본 국민을 감동시켰다. 이수현의인문화재단 설립위원회(위원장 강지원)의 노치환 사무총장은 이수현처럼 한국인을 위해 희생한 일본인은 누가 있을까 찾던 중 다쿠미를 발견하고 그의 현창사업에 나섰다. 노 총장은 아사카와 형제 현창회 사무국장도 겸하며 2015년부터 다쿠미 형제 한일 합동 추모식을 주도하고 있다. 현창회는 노리타카의 시집 출간을 추진하는 한편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잠자는 노리타카 기증 유물의 기획 전시를 박물관 측과 협의하기로 했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계기로 급격히 얼어붙은 한일관계가 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 경향과 맞물려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의 소행이 아무리 밉다 해도 우리는 숙명적으로 일본과 이웃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 최근 아사카와 형제 등 15명의 이야기를 담은 책 '친구가 된 일본인'을 펴낸 이동식 현창회 부회장은 "대부분 일본인이 조선에서 돈을 벌고 권력을 행사하는 재미에 취해 있을 때 이들은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우리를 대변하려 했으며 부족했던 학문의 밑바탕을 채워주었고 자칫 없어질 뻔했던 우리의 문화를 기록하고 지켜주었다"면서 "선한 일본인, 고마운 일본인들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의 마음도 조금은 열리고 좀 더 차분한 눈으로 미래를 같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며 일본인의 진정한 사죄를 촉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먼저 일본인 의인을 기리고 본받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일본인들도 우리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 

/이희용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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