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성' 이후 2년만의 시집 발간
삶의 성찰 136편 해학-비유 웃음 줘

따뜻한 감성과 토속적인 시어로 특별한 시맛을 선사하는 조기호 시인의 신작 ‘하지 무렵(인간과문학사)’이 출간됐다.

시인의 스무 번째 시집으로 ‘전주성’ 이후 2년여 만에 나온 이번 시집에는 삶에 대한 성찰과 인간애가 녹아든 136편의 시들이 실려 있다.

“맥주 안주에는 김치가 그만이라며/거나하게 꼬부라진 목소리로/추석 며칠 앞둔 날/천리 길 양평 땅 망리 텃밭에서/시 농사짓고 사는 양시백의 전화다/두물머리 도도히 흐르는 강물 위/아침 물안개 피어난 물비린내도 같고/들꽃수목원의 구절초 가실 향기도 같아/각박한 이 세상 어느 선술집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나를 생각해주는 사람 있다는 게/얼마나 가슴 저리게 척척한 오르가즘인가/코끝이 찡-하게 매워서/눈물이 왈칵 쏟아질듯하여/고개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맑은/가실 하늘만 한 모금 머금었다/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데/김치 한 보시기 놓고 맥주병 따던 니나노 집/옛 세월을 되새김질하며 사는 나이에 이르러/사람 산다는 게 그런 걸 어쩌랴/이제 저 시인도 나만큼 늙어 가는 가 보다”(‘산다는 것’ 전문)타인의 안부를 묻는 것도, 누군가 자신의 안부를 걱정해주는 것에도 무감각해지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시인은 사소한 일상의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의 나이가 될 무렵쯤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연륜을 통해 자연스레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책은 1부 ‘그리움이 솟아나는’, 2부 ‘이별백신’, 3부 ‘민들레 예수쟁이’, 4부 ‘하늘가는 길’, 5부 ‘여름 걸가기’, 6부 ‘사랑허물기’, 7부 ‘전주성’, 8부 ‘보리똥 익을 때’ 로 엮어져 환하고 따뜻한 상상력과 매너리즘을 거부하는 싱싱한 언어들을 확인 할 수 있다.

“허리 수술 받고/회복실로 실려 온 아내가/의식이 돌아오려는 혼미한 순간/첫마디가 아들 녀석 이름만 부른다/곁에 앉아 손을 잡고 바작바작 애를 졸이며/기다리는 사람/살 부비고 50년을 산 나는 무엇인가//이런 허퉁하고 맹랑한 질투라니”(‘질투’ 전문)“요즘은 아내에게 혼나는 재미로 산다//집에 들어오기 무섭게/오늘도 혼이 났다//침침한 눈으로 시집을 읽으려다/아직 밖이 훤한데 벌써 불을 켰다고 혼나고//TV는 저 혼자 놀게 켜놓고/비실비실 졸고 앉았다며 또 혼이 났다//속으론 남편체면이 깎일까봐/일을 시키지 않으려고//어머니 기일에 쓸 생률과/더덕껍질을 손수 벗기면서도//아내는 그저 나를 혼내는 재미로/황혼 무렵 사랑을 그리 소화하는 게다//비시시 웃고 있던/막내사위 녀석이//우리 이웃집 영감님은요/아침에 눈 떴다고 혼났데요//한 수 거든다”(‘황혼 무렵’ 전문) ‘질투’와 ‘황혼 무렵’ 모두 능숙한 해학과 웃음 짓게 만드는 생활밀착형 시로 삶의 일부를 훔쳐본 기분이 든다.

진심이 담긴 귀여운 투정은 시의 운율을 맛깔스럽게 살려내며 읽는 기쁨도 얹어준다.

또 시인이 쌓아 올린 견고하고 풍성한 이야기는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사람의 성숙함과 지혜로움, 자신의 상황을 알고 인정하는 겸손함까지 담아내며 담백한 시의 맛을 음미하게 만든다.

노년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 넘치는 비유적 이미지와 해학적인 표현들이 묻어나는 이번 시집은 오직 조기호 시인만의 명랑성과 낙관성을 드러내며 소박하지만 긴 여운을 자아낸다.

전주 출생으로 문예가족을 비롯해 전주풍물시인동인, 전주문인협회 3~4대 회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는 ‘저 꽃잎에 흐르는 바람아’, ‘바람 가슴에 핀 노래’, ‘산에서는 산이 자라나고’, ‘가을 중모리’, ‘새야 새야 개땅새야’, ‘노을꽃보다 더 고운 당신’, ‘별 하나 떨어져 새가 되고’, ‘하현달 지듯 살며시 간 사람’, ‘묵화 치는 새’, ‘겨울 수심가’, ‘백제의 미소’, ‘건지산네 유월’,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꿈꾸었네’, ‘아리운 이야기’, ‘신화’, ‘헛소리’, ‘그 긴 여름의 이명과 귀머거리’, ‘전주성’, ‘민들레 가시내야’, ‘이별백신’ 등이 있다.

목정문화상, 후광문학상, 전북예술상, 시인정신상, 표현문학상, 전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박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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