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전국대회 명무부 대통령상
이매방류 살풀이춤 펼쳐내
역경 극복하며 40년 외길걸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기쁜 마음도 있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 쌓인 그늘이 없어진 기분이다. 후련한 느낌이다.”

제23회 한밭전국대회 명무부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은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 김미숙 교수의 소감은 의외로 담담하다.

상에 연연하기보다는 그동안 쌓였던 마음의 상처를 아문 것이 이번 대회의 수확이다.

두 번째 출전이다.

지난 2013년도에 처음으로 전국대회에 나갔다.

상에 대한 기대도 컸고, 분위기도 좋았다.

하지만 보기 좋게 고배를 마셨다.

결과에 대한 상처가 너무나 컸다.

기대가 컸던 만큼 그에 대한 아픔도 컸던 것이다.

이후 전국대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국악원 일정도 빡빡해 시간 내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2년전 무용단에서 교육학예실로 자리를 옮기면서 대회가 눈에 들어왔다.

항상 무대에 있었던 터라 준비된 상태지만 올해 2월부터 본격 연습에 들어갔다.

자신의 스승인 이매방류 살풀이춤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가슴 한 켠에 쌓였던 상처를 멀리 보낸 것이다.

담양 출생으로 광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간만 나며 동네 국악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소녀였다.

하지만 주위의 반대로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본격 춤을 배웠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이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춤에 매진했다.

특기장학생으로 고교생활을 보냈고 조선대에서 자신의 무용인생을 펼쳐나갔다.

송준영 선생에게 한국창작무용을 배웠고, 2003년에는 서울을 오가며 이매방 선생에게 살풀이와 승무를 익혔다.

현재는 이매방류살풀이춤 이수자로 활동 중이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대학교 4학년 때 우연히 봤던 전북도립국악원에 합격이 되면서 전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합격 후 한 달만 다니자 할 정도로 고민도 했다.

당초 원했던 곳도 아니었고 전주에 올 줄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몇 년은 광주에서 출퇴근을 할 정도였다.

“한 달만 다니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어느덧 30년이 지났다. 합격한 후 고민도 많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도립국악원에 온 것이 너무 감사하다. 관립단체란 테두리 안에서 하고 싶은 공연을 한다는 것은 예술인 입장에선 행복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춤을 추는 게 너무 좋지만 그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프리랜서로 활동할 경우 그 현실을 더욱 가혹하다.

돈이 없어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한다면 관립단체 소속 예술인들은 든든한 지원을 받는 셈이다.

그렇다고 나태해져선 안된다.

지원이 든든할수록 그에 대한 기대도 큰 셈이다.

자기개발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필수며, 소속단체의 예술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선 느긋하게 쉴 여유도 없다.

교육학예실로 자리를 옮긴 직후 적응이 힘들었다.

평생 무대에서 활동하다 이제는 연수생을 상대로 무용교육에 나서야 한다.

연수생을 대상으로 무언가를 줘야 하는 입장에서 춤의 원리 등을 전수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마음껏 무대에 서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다.

지금도 무용단 공연 소식만 들으면 귀가 솔깃하다.

결원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당부할 정도다.

그럴 정도로 춤을 추는 무대가 너무나 행복하고 그리운 장소인 셈이다.

40년 동안 춤 인생을 걸어왔다.

좋아서 시작한 춤이 직업이 됐고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

몸이 허락할 때까지 춤을 출 각오는 기본이다.

그럴수록 자신의 몸도 사랑해야 함도 알게 됐다.

자신의 몸을 사랑해야 더 좋은 무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계획은 없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왔던 만큼 큰 변화를 주지 않을 요량이다.

그럼에도 항상 머릿속에는 무대가 떠나지 않는다.

“힘들고 험한 길이지만 욕심 없이 성실하게 이 길을 걸어왔다. 성실하게 살아왔고 그러다보면 좋은 일이 생기게 된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춤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왔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단출하지만 내가 가진 큰 계획이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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