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8월 17일에 탈북한 태영호 공사가 최근『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자서전을 냈다.

이 책은 출간하자마자 독자들의 관심이 쏠리면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태 공사의 탈북 소회와 북한 권력의 역학관계, 핵 보유를 위한 정략 등을 잘 드러냈다.

태영호 공사는 북한에서 성골에 해당하는 핵심계층이다.

그의 부모는 대학과 초등학교의 교원이었고, 아내는 김일성과 빨치산 투쟁을 함께 한 오백룡 가문의 일가다.

장인은 김일성 정치대학의 총장을 지낸 오기수이고, 장인의 형제들은 북한 군대의 막강한 실력자들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태영호 일가의 탈출은 북한 권력 핵심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그 기능이 잘 작동되었기에 그는 자긍심과 충성심을 가지고 성장했다.

그러나 1967년 5월 25일, 김정일의 ‘5.

25 교시(敎示)’ 이후 북한은 공산주의의 근본철학을 팽개치고 세습왕조 체제를 구축하기에 바빴다.

이는 곧 김일성 부자(父子)를 신격화하고 우상화하면서 봉건시대의 왕조국가로 회귀하고 만 것이다.

인민을 핵심계층과 동요계층, 잔여분자로 구분하면서 확고한 신분세습사회로 역행했다.

이 자서전에 따르면 김정은은 김일성 부자(父子)가 누렸던 태생적 카리스마스를 확보하지 못했다.

백두혈통이라지만 김일성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이십대 후반에 권력을 쥐었지만, 노쇠한 혁명 열사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핵폭탄 개발에 몰두했고, 고모부 장성택 숙청으로 대표되는 공포정치를 펼쳤는데, 이는 어쩌면 그의 생존전략이기도 했다.

태영호는 어려서부터 영특해 공부를 잘했고 여러 번의 외국 유학을 통해서 누구보다 당차게 살았다.

게다가 막강한 실세 가문의 사위가 됨으로써 승승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자서전에 나타나듯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아주 특별했다.

학령기에 있는 외교관 자녀들의 동반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노심초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여러 번 비쳤다.

그런데 북한에도 개혁개방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외교관 자녀의 유학을 장려한 것이다.

태공사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큰아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했다.

그런데 2016년 3월, 중국의 북한식당 여자 종업원들이 집단 탈북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북한에서는 그 원인을 인터넷을 통해 남조선 콘텐츠를 기웃거리다가 머리가 돌아버린 것이라며 각국에 있는 외교관의 자녀들을 그해 7월에 전원 귀국시키라고 명령했다.

태공사는 7월 말이면 아들의 학기가 끝난다며 사정했지만, 북한당국의 지시는 요지부동이었다.

7월이 다가오자 아들의 얼굴빛이 흐려졌고, 아내 또한 말수가 차츰 적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동안 자신이 믿고 충성했던 북한체제에 대하여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살 권리도 없는가? 이렇게 더는 살지 말자.

이게 무슨 사람의 삶이냐’라고.

지금껏 북한 체제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그가 받은 특전과 혜택 또한 적지 않았지만, 자식의 미래를 놓고 더 이상 저울질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식에게만은 자유를 찾아주고 아무 때나 명령과 지시에 따라야 하는 노예의 삶을 벗겨주고 싶었다.

자신의 일가가 다 함께 있으니 탈북의 초소한의 조건이 마련된 셈이니 결정 또한 빨랐다.

그는 마침내 탈북을 위해 대사관을 빠져 나왔다.

이때 자신의 아들들에게 한 말이다.

“오늘, 이 순간 노예의 사슬이 끊어진다.” 아들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마련해 준 태영호 라는 아버지의 용기와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대한민국에서 통일 여는 일꾼으로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제 한반도에는 반세기 이상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고 남북의 화해 무드가 급물살이 일어나고 있다.

며칠 후에 있을 북미정상회담에서 평화와 통일의 서막이 열기기를 소망해 본다.

송일섭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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