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부성 남문밖 서학동에는 민초들이 살던 삶의 흔적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의 냄새가 물씬나고, 정이 넘치는 동네가 되었다.

전주에 3대 바람통이 있는데 그 중 좁은 목, 초록바위 바람통이 있으니 얼마나 시원하고 살기 좋은 동네인지 짐작할 만 할 것이다.

동네 아이들의 고함지르며 뛰어 놀던 골목길인 놀이터, 아낙네들의 소통과 빨래터인 우물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동네 서학동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초록바위 인근에 벽화로 침침하고 깜깜했던 곳에 잠들었던 전봉준장군이 다시 혁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하여 생전의 모습으로 해 놓았다.

국가의 융성을 기원하며 만개한 무궁화를 만날 수 있도록 서학예술마을 50명의 예술인들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서학동에는 충경공 이정란 장군과 남고산성이 있어 전주부성의 사고를 지켜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게 하였다. 남고산성에는 군사 1,000여명이 주둔하였다.

고려말 충신 포은정몽주는 황산벌에서 왜구를 물리친 이성계장군이 대풍가를 읊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말을 타고 남고산성으로 달려가 암각서를 남겼다, 또한 전라관찰사 이서구의 암각서도 있다.

남고산성에는 경치가 천이 보인다는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가 있으며 남고사와전주팔경중 남고모종이 있었으나 종은 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임진왜란과 함께 군사와 국가를 지켜준다는 삼국지의 관운장을 모시는 관성묘가 있으며, 이여송 휘하 명장 두사충이 춤을 추자 나무도, 하늘도 땅도, 타고 온 말도 춤을 추었다는 두무소의 자연 경관은 개발로 간곳이 없다.

구이에 보광사란 사찰이 있어 구이, 평촌에서 전주로 넘어 오던 고개를 보광제라 불려다는 보광제는 민초들이 나무를 지게에 메고 전주 남문 성당 인근에서 팔고 막걸리 한잔에 쌀 한말 사서 지게에 매달고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배고픔을 달래주던 보부상 길 보광제.

이팝나무 군락지 초록바위는 천주교 박해로 신자 남명희와 홍봉주의 아들이 1867년 가을에 수장 되었고, 동학혁명의 지도자 김개남 장군과 수많은 동학혁명군 포로들이 처형된 성지이다. 당시 동학혁명군들의 붉은 피가 전주천을 붉게 물들이며 몇날 며칠을 흘렸다고 한다.

일본의 기록에 김개남장군이 서교장에서 처형했다는 기록으로 인하여 지금까지의 처형장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우리나라 기록이 우선이지 36년동안 우리의 정신과 혼을 없애려고 한 일본의 기록으로 흔들렸다는 사실은 아연실색이다.

1894년 전라감사 김학진-동학지도자 전봉준이 최초로 민-관이 협의하여 집강소가 전라감영에 설치되는 역사적인 성과는 우리나라 민중운동의 시작이며 3.1운동, 학생운동으로 이어져 온 민주화의 진정한 전라도 정신이다.

이렇게 서학동에는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한 민초들이 삶과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도시개발의 제한과 여건이 성숙되지 못하여 사회 간접 자본이 투자되지 않아 불과 몇 년전에야 전기와 수도가 공급된 흑석골, 오폐수관이 없는 현재의 서학예술마을이다.

동네 골목길은 놀이터요, 생활공간이며, 동네 우물은 아낙네와 엄니들의 소통공간이다 보니 사람 냄새가 나고 정이 넘치는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동네 서학동이 동, 서를 떼어내고 학이 깃든 서학동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동서가 통합된 서학동은 전주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는 주민자치센터(공연장, 체육관, 수영장, 자치프로그램 운영교실, 청소년들의 취미교실 등) 신축과 동서 주민센터가 향후 5년 이상 공무원 인원 유지와 운영비가 보장되어 개발에서 소외 되어온 서학동의 주민들이 삶의 질이 향상 된 서학동에서 살고 있다는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전주시행정 서비스를 기대한다.
 
/한중문화협회 박영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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