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의 초승달 품은 명주를 빚다
여름밤의 초승달 품은 명주를 빚다
  • 김성아
  • 승인 2018.08.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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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빛깔 '미향'을 담은 한 그릇

동쪽으로는 소백산맥을 끼고 서쪽으로는 서해안과 드넓은 호남평야를 품은 전라북도.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질 좋은 작물과 싱싱한 해산물까지, 지리적 여건상 식재료가 풍부해 우리나라에서 ‘음식 1번지’로 손꼽히고 있다.

이미 명성을 얻은 한식과 비빔밥 등은 물론 다양한 특산품 덕분에 전라북도만의 토속음식이 많다.

특히, 우리나라 음식의 기본이자 정신인 ‘장’만큼은 전북을 따라올 지역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명성 뒤에는 오랜 세월동안 전통의 명맥을 이어온 식품명인이 있기에 가능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환경에 식생활도 많이 바뀌었지만 이들은 묵묵히 인고의 시간과 정성을 더 해 전통의 맛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생활환경이 변해도 맛의 기본은 변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과 우리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식품명인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전통음식을 계승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맛의 고장 전북’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 전통의 맛을 계승·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식품 명인 10인을 만나 세월을 품은 맛의 이야기를 총 5회에 걸쳐 전한다.
/편집자주 

<1>대한민국 3대 명주 ‘이강주’를 빚는 1세대 주조 명인 조정형

조선 중기 상류 사회에서 즐겨 마시던 고급 약주이며 ‘조선 3대 명주’로 불리는 ‘이강주(梨薑酒)’.

애주가들 사이에서 ‘여름밤 초승달 같은 술’이라 표현되는 이 전통주는 현재 고천(古泉) 조정형 명인의 손에서 빚어지고 있다.

‘고아내려 만든다’라는 의미의 이강고(梨薑膏)라고 불렸던 지금의 이강주는 조정형 명인 가문의 6대째 내려오는 가양주다.

완산골 부사 가문으로 문인들을 대접할 일이 많았던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오던 술이었지만 조 명인의 손을 거치면서 그 진가를,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강주의 오늘의 명성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술과 함께 울고 웃었던 조정형 명인의 전통주에 대한 열정과 신념이 있기에 가능했다,여든을 바라보는 명인의 술 인생은 당시 굴지의 양조회사인 삼학소주에 ‘공장장’으로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의와 함께 시작된다.

전북대학교 농화학과에서 발효학을 전공하고 농대 전체 수석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삼학소주에서 신공법 도입을 위해 당시 24살밖에 되지 않았던 조정형 명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주조사 1등급, 보일러, 환경 등 술 제조를 위한 자격증은 모두 갖추고 있었던 만큼 그는 전공을 제대로 살려 삼학소주의 부흥기를 함께했으며, 이후 이리 보배소주, 전주 오성주조, 제주 한일소주 등 유명 양조회사에서 공장장으로 25년을 근무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해외의 술을 베이스로 활용해 ‘돈만 버는 술’을 제조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면서 전통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쩜 이 순간이 조 명인의 진짜 술 인생이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공장 내에 연구실을 꾸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동시에 전통주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어요. 전통주를 술의 베이스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죠. 그런데 당장 성과가 안 나니까 회사에서 좋아했겠어요.”

그때 그 결심을 접고, 공장장의 위치에 만족했더라면 아마도 현재의 이강주도, 명인으로서의 지위도 없었을 것이라고 명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통주에 관심을 갖는 이가 한 명도 없었던 1970년대 중반부터 전통주 연구를 위해 문헌 수집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녀 간첩으로 오해받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고.

세월이 지난 지금 이런 이야기를 추억 삼아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조 명인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전국을 누비다 보니 회사 내에서의 업무 차질은 기본이고 가세마저 기울어 아내와 세 딸까지 고생을 해야 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와 친척들의 외면을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하는 명인의 마음 한편에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때의 아픔이 남아 있는 듯했다.

강산이 한 번 변할 동안 심신의 고단함을 통해 얻은 전통주 비법으로 200여 가지의 주종을 직접 담그며, 연이은 실패로 좌절과 실망감에 빠졌던 순간에도 그는 항상 다시 일어나 주조 장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1988 제24회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것 찾기 열풍이 불면서 조 명인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이강주’로 1987년 전북 향토무형문화재 6호로 지정, 그동안의 노력을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강주의 진가를 알아본 한 대기업에서 계약서를 갖고 오면서 조 명인은 1990년 전주이강주를 설립하며 술 인생 2막을 열었다.

이후 1996년 전통식품명인 9호, 1999년 신지식인 농업인 5호로 지정되면서 단순히 술을 제조해서 파는 이가 아닌 전통주를 계승·발전시켜 나가는 명인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인정받게 됐다.

‘고천’이라는 호 역시 술에 미쳐 전국을 떠돈다고 외면했던 아버지가 지어준 것으로, 이는 아버지에게 명인으로서 인정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조 명인은 “수많은 비법을 통해 빚어낸 술 중 역시 이강주만 한 게 없었다. 지나고 보니 가양주를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컸던 것 같다. 이를 통해 가문에서 인정을 받고 싶었다”며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결실이 ‘명인’이라는 두 글자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기에 여전히 나는 전통주를 위한 길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주의 제조법 계승자 중 생존해 있는 마지막 ‘1세대 주조 명인’이지만 아직도 조정형 명인은 이강주를 빚으며 전통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이강주의 최고의 맛을 찾기 위해 여전히 노력함은 물론 국내 최초 가루술을 개발하는 등 여전히 그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명인들에 대한 가치를 재조명하는 일에도 적극 나서며 한국명인협회 초대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지금은 우리의 삶이 녹아들어 있는 전통을 후손들이 이어갈 수 있도록 후학 양성에도 몰두하고 있다.

“완주에 있는 2공장은 가루술 전문으로 전환하고 이강주의 뿌리인 전주공장은 전통주를 알리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새단장할 계획입니다. 전통주의 메카로 만들어 다음 세대들이 이를 이어갈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기반을 다져놓을 것입니다.” 


▲이강주는 이름(배나무 이(梨), 생강 강(薑)) 그대로 전통소주에 배와 생강이 많이 들어가는 술이다.

이외에도 울금과 계피, 꿀이 들어가며, 이를 6개월 이상 숙성시켜 여과하면 연한 노란색을 띠는 이강주다.

배와 울금의 조합으로 독특한 향과 맛을 가지고 있는 데다 과음에도 숙취가 전혀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2>미향, 전주비빔밥에 모든 인생을 담아낸 명인 김년임  

세계에서 4번째이자 국내 유일의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인 ‘전주’.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음식한류를 견인하고 있는 전주의 맛은 가장 한국적인 맛이라고 꼽히는 만큼 ‘미향(味鄕)’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명성은 대표적인 한 그릇 음식인 비빔밥, 아니 정확히 말해 ‘전주비빔밥’이 있기에 가능했다.

김치, 불고기와 함께 3대 한식으로 꼽히며 음식의 한류를 선도한 전주비빔밥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전주비빔밥에 대한 열정은 젊은이 못지않은 농림수산식품부 지정 대한민국 식품명인 39호 김년임 할머니의 인생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식품명인 외에도 전주시 음식명인 1호, 전북 무형문화재 39호 등 화려한 이력이 증명해주듯 전주비빔밥이 인생이요, 인생 자체가 전주비빔밥이기 때문이다.

김년임 명인의 비빔밥과의 인연은 전주비빔밥 지정업소 1호로, 비빔밥 명가라 불리는 ‘기족회관’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사실, 1979년 문을 열 당시에는 전주비빔밥보다는 로스구이와 콩나물국밥으로 명성을 얻었다.

소위 ‘맛집’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 것.

그런데 김년임 명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이상하게도 기쁘지 않았다고 한다.

“내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요식업에 직접 뛰어들게 됐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장사’만을 위한 메뉴인 것 같았어요. 돈만 좇았다면 인기 메뉴를 계속했겠지만, 이상하게 보람되지 않았던 거죠. 그 허전함을 어느 날 비빔밥이 채워주더군요.”

한 그릇에 담기는 비빔밥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하면서 비빔밥 명인으로서의 운명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시 비빔밥은 서민음식으로 별다른 상차림 없이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겼지만 가족회관은 다른 집과 달리 처음부터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돌그릇에 담아냈다.

먹는 이에게 따뜻한 정을 함께 내어 준 것이다.

그런 정성을 알기에 자연스럽게 비빔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운명이라 느꼈는지 과감히 모든 메뉴를 정리하고 20여 년 전부터 비빔밥만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김년임 명인은 단순 비빔밥이 아닌 전통을 담은 ‘전주비빔밥’을 고수하며 이를 정량화,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그저 음식 한 그릇을 파는 게 아닌 맛의 고장 전주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한국 고유의 오방색을 비빔밥에 입혀 마치 고급 요리인 신선로처럼 배열해 눈으로 맛을 보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20가지의 재료가 오방색(황, 청, 백, 적, 흑)으로 나눠 질서정연하게 어우러져 방짜유기에 담기면 정말 먹기에 너무 아깝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야말로 씨줄과 날줄을 엮어 베를 짜듯, 비빔밥을 짜낸다는 표현이 딱 맞은 것 같다,  젓가락으로 살살 비벼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 사골 육수로 지어진 따뜻한 밥과 20가지의 재료, 이를 하나로 어우러지게 하는 고추장까지, 이 맛이 전주의 맛이구나 싶다.

이를 지키기 위해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주방을 떠나지 않고 있다.

비빔밥 명인이 의아하다는 이들도 가족회관의 상차림과 첫술에 ‘아~’하는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전주를 찾은 외지인들이 한식의 상차림과 전주비빔밥을 모두 원한다는 설문을 조사를 통해 지금의 가족회관의 상차림을 갖추고 이를 고수하고 있다.

가족회관이 곧 전주의 맛이라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전통의 맛을 기본 원칙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상에 담긴 것이다.

김년임 명인은 “맛의 고장이라는 명성은 그냥 지켜내는 게 아니다. 수고스러움과 고집스러움이 없으면 안 된다”며 “내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절대 내어줘서는 안 된다. 음식은 정성과 정직함이 우선이며 그것이 곧 전통이다”고 말했다.

이에 명인으로서의 책임감과 맛이 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그의 고집으로 다른 음식점과 달리 가족회관은 여전히 분점을 내지 않고 있다.

또한, 이곳의 직원들 역시 명인의 비빔밥에 대한 철학과 그동안의 노력을 알기에 재료 하나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명인으로서의 더욱 인정을 받는 것은 전주비빔밥을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널리 알리며 전주 음식의 가치를 높여 놓았다는 것이다.

몸이 불편한 순간에도 전주비빔밥을 알리는 자리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그가 전주비빔밥을 직접 선보이고 비벼낸 나라만 해도 30여 개국이 넘으며, 더 놀라운 것은 모든 재료를 일일이 삶고 다듬어 직접 한국에서 공수해 간다는 점이다.

심지어 고사리 등은 직접 말려서 현지에서 불려서 조리하고, 황포묵은 가루를 가져가 현지에서 직접 쑨 적도 있다고.

“한식의 세계화는 우리 것을 그대로 전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식재료를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법 아니겠어요.”

이런 까다로운 원칙 때문에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가장 한국다운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으며 오늘의 전주비빔밥의 명성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이제는 그 정신과 전통의 맛을 김년임 명인의 딸인 양미 씨가 이어가고 있다.

명인을 닮아 타고난 손맛이 있지만 김년임 명인이 지키고자, 전하고자 했던 그 뜻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전주비빔밥에 대한 원칙과 소신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다.

명인을 닮아 이유 있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김년임 명인은 “전주비빔밥 한 그릇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전주의 맛이, 미향으로서의 명성이 이어지길 바란다”며 “명인이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게 지금까지 비빔밥을 위해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지 않겠느냐”면서 환하게 웃었다.

/김성아기자 tjd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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