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배기' 전통장맛 깊고 진하게 이어가

# 시류에 흔들림 없이 사찰 명주 ‘송화백일주’의 명맥을 이어오는 식품명인 1호 벽암스님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7부 능선에 터를 잡은 천년고찰 수왕사(水王寺)의 법주인 ‘송화백일주’.

애주가들 사이에서 평생 곁에 두고 마시고 싶은 술로 소개되며 귀하디귀한 대접을 받는 이 명주는 수왕사 주지에게만 전승, 현재 12대 전승자인 벽암(碧巖)스님(속명 조영귀)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2세 이른 나이에 출가해 김제 흥복사를 거쳐 17세부터 수왕사에서 법력을 쌓으며 반세기 동안 송화백일주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1980년대 후반 사찰법주인 송화백일주가 속세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스님이 술을 빚는다고?’라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불가와 술은 상극이라 여겼기 때문.

하지만 송화백일주의 시작을, 사찰에서의 법주의 의미를 알고 나면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불가에서 술은 기(氣)를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제였어요. 깊은 산속에서 오랜 시간 수행을 이어가다 보면 고산병이나 냉증에 걸리기 십상인 만큼 이를 치유하고 예방하기 위해 저마다의 비방으로 법주를 빚어낸 것이죠. 증류주의 출발이 약이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수왕사의 송화백일주도 이런 이유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명승이자 작은 석가로 불린 진목대사(1562~1633)가 수왕사에서 수도하며 고산병을 고치기 위해 빚기 시작, 현재까지 약 400여 년이 가까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월의 변화로 불가에서 사찰법주가 모두 사라진 순간에도, 일제강점기와 전쟁 등 한반도의 역사적 격변의 시기에도, 수왕사의 송화백일주는 단 한 번도 명맥이 끊긴 적이 없다.

이에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수왕사 역시 현재 사찰 법주를 지니고 있는 유일한 곳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송화백일주의 가치와 명성은 12대 전승자인 벽암스님이 있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1994년 대한민국 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되면서 한층 더 높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 방식을 고수하며 지켜온 송화백일주를 명주로, 그 가치를 널리 알린 일등공신이기 때문.

 여기에 식품명인 1호로 지정되면서 문화 계승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앞당겼으며 전통주의 가치를 높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식품명인 1호로 지정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하지만 이는 벽암스님이 명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1986년 서울아시아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전통을 찾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산속에서 묵묵히 수백 년의 명맥을 이어온 벽암스님에게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당시 술은 국세청에서 주도했던 만큼 농림부에서 주조 장인을 명인으로 지정하려다 보니 부처 간 갈등이 생겼고 이로 인해 시기가 점점 늦춰지게 됐다.

그러던 중 농림부 한 직원의 송화백일주를 맛본 뒤 이는 지켜내야 할 정신이 담긴 명주라며 끝내 명인제도를 도입했다.

 “수왕사, 이름 그대로 물의 왕이라는 의미로, 물왕이 절이라고 부릅니다. 좋은 술의 기본은 물인데 최고의 물맛을 자랑하는 곳에서 빚은 술이니 술맛은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어요,”

송화백일주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면서 이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 벽암스님은 수왕사 아래 송화양조라는 자그마한 공장을 차렸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를 통해 돈을 벌고자 한 적이 없다.

해서 수십 년간 소량만을 빚어내고 있는 데다 몇 년 전부터는 1년에 2천명을 넘기지 않고 있으며 지금은 이마저도 줄여나갈 계획인 만큼 송화백일주는 그야말로 아무 때나 맛볼 수 없는 술이다.

송화백일주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명주로 손색이 없으며, 진묵대사가 즐겼다는 송화오곡주도 마찬가지다.

벽암스님은 “송화백일주는 주원료인 송홧가루, 송순, 솔잎을 채취하는 일부터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데다 원료도 많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빚어낼 수 있는 술이 아니다.

더욱이 3년이라는 긴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며 “송화오곡주 역시 땅속에 묻어두고 서서히 발효 숙성하는 만큼 천천히 빚어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과정을 떠나 단 한 번도 돈을 벌고자 한 적이 없다”며 “문화와 전통, 수왕사 법주의 명맥을 이어가고자 명인으로서, 전북무형문화재로서 의무를 다하겠다는 의지로 이를 빚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벽암스님의 어조는 단호했다.

이에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스승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 전수자를 키워냈으며, 정신문화의 한 장으로 민속주 법통을 잇는다는 벽암스님의 정신은 13대 전수자 조의주 씨에게로 온전히 전해졌다.

송화백일주의 명맥을 잇는 자부심과 책임감, 최상의 맛을 내어놓겠다는 13대 전주자의 고집과 집념은 이미 스승인 벽암스님을 넘어섰을지도 모르겠다.

전통방식에만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어느 순간에도 송화백일주를 빚어내는 이유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

흔히 시중에 유통되는 술로, 대중화라는 시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오롯이 명맥을 유지해 나갈 만큼의 술 빚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조 씨 역시 스승을 닮아 이미 명인의 반열에 올라와 있는 셈이다.

송화백일주를 통해 전하고자 한 정신을 그대로 계승해주고 있는 제자의 모습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식품명인 1호 벽암스님의 입가에는 솔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송화백일주의 향 같은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품격 있는 장, ‘천리장’의 맛을 이어가는 식품명인 50호 윤왕순

‘천리장(千里醬)’ ‘천리 길을 들고 가도 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 음식 책인 ‘신가요록(1450년)’과 ‘증보산림경제(1766년)’에서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전통 장으로, 파평 윤씨 가문의 내림장이다.

특히, 고종에게 진상됐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집안에서도 아무 때나 맛볼 수 없는 귀한 장으로 가문의 35대손인 윤왕순 명인이 그 맛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가문의 내림장이 천리장이라는 이름을 찾은 것은 십수 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전에는 그저 집안에서는 ‘고기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윤 명인은 “어린 시절 혼나면서 먹었던 그 맛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생각이 나더라.

장을 담그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이상 그 맛을 재현하고 싶었다”며 “그 과정에서 이 장이 천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이걸 통해 지난 2013년 식품명인 50호로 지정, 명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그 귀한 장이 제 이름을 찾지 못했을뿐더러 집안에서도 그 맛을 이어가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윤 명인이 전통 장을 본격적으로 담그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년이 조금 넘는다.

10대 때 고향인 완주군을 떠나 경기도에 살다 50세가 넘어서 장을 담그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부터다.

 하지만 10남매 중 어머니 손맛을 그대로 빼 닮았기에 윤 명인은 경기도에서도 향토음식기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으며, 연구소와 대학에서 전통음식 공부를 하며 강의를 했다.

그러던 중 한식을 알려면 그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전통 장을 제대로 알아야 갰구나 하는 생각에 마흔다섯에 처음으로 장을 담그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천리장 재현으로 관심이 쏠렸다고.

“어머니가 장을 담근다고 하니 얼마나 싫은 소리를 했는지 몰라요. 그러면서도 깐깐한 스승님이셨죠. 어머니의 맛을, 집안의 맛을 재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몰라요. 천리장은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 쉽게 담을 수 없는 장이거든요,”    

천리장의 맛의 비결은 간장이다.

전통방식 그대로 메주를 쑤고 잘 말려 곰팡이를 피운 뒤 간수가 빠진 소금물을 더해 숙성시킨다.

이를 깨끗이 거르면 천리장의 주재료인 맛이 달고 맑은 감청장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소의 볼기짝 살인 우둔살을 썰어 채반에 말린 뒤 삶고, 이를 가루로 만들어 감청장과 함께 넣어 가마솥에서 오랜 시간 졸여내면 천리장이 완성된다.

비교적 간단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 맛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

특히 전통방식을 고집하며 시간과 정성을 들여 탄생되는 맛이다 보니 이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괜히 천리장 명인이 아닌 것이다.

향토음식과 장 담그기, 천리장 명인, 그러고 보니 그는 전통음식을 떠난 적이 없었다.

어쩜 식품명인은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윤왕순 명인은 항상 장 담그기를 통해 인생 2막을 열고, ‘천리장 명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 김석진 씨의 응원 덕분이라고 말한다.

명인이 손수 내어주는 밥상을 매일 받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느냐며 정성을 담아낸 아내의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공공연하게 자랑하는 그다.

한 번도 손에 흙을 묻힌 적이 없는 남편은 윤 명인이 고향으로 내려와 본격적으로 천리장을 담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

햇볕이 잘 들고 물이 맑아 장을 담그는데 안성맞춤인 지금의 터전 역시 남편이 공을 들여 찾아낸 장소다.

뿐만 아니라 장의 가장 기본 원료인 ‘콩’ 역시 남편이 손수 농사를 짓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여기에 윤 명인의 딸까지 천리장의 명맥을 이어가겠다면서 힘을 보태고 있다.

지원군이 한 명 더 는 셈이다.

 하지만 뒤를 잇겠다는 딸의 말에 윤 명인은 천리장 만드는 법을 전수해 달라고 어머니를 찾았을 때 ‘이 고생스러운 것을 뭐 하러 만들려고 하느냐’고 들었던 핀잔을, 똑같이 딸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그 말 속에 어머니의 어떤 마음이 담겼는지를 알게 됐다고.

불혹이 훌쩍 넘은 나이에 천리장의 가치를 더 높이고 알리고자 이를 주제로 논문까지 쓰고 있는 딸의 마음이 어떤지를 알기에 윤 명인은 남편이 그랬듯이 뒤에서 묵묵히 지원군으로, 스승으로의 길을 가고 있다.

이에 윤왕순 명인은 전통 방식을 고스란히 전수, 그 명맥이 이어갈 수 있도록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자리를 지킬 생각이란다.

또한, 천리장의 맛을 널리는 일에도, 맛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을 지키는 일에도 명인이 해야 할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 장맛이 후대까지 이어가기 위해서는 만드는 사람의 묵묵함도 있어야 하지만 먹어주는 이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식생활의 변화로 젊은이들이 진짜 장맛을 맛볼 기회가 없는 것 같아서 속상 상합니다. 해서 천리장을 통해 우리 후손들이 우리의 맛을 잊지 않도록 지금처럼 전통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으로, 정성 들여 장을 담아낼 것입니다.”

/김성아기자 tjd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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