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고 했다.

2020년에는 2017년 대비 55% 인상한 시급 1만원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이 바로 그것이다.

최저임금제란 저임금의 제도적인 해소와 근로자에 대하여 일정한 수준 이상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한 제도이다.

이것이 법제화된 것은 1986년 12월 31일이다.

'최저임금법' 이란 이름으로 제정 공포되었으며 본격 실시된 것은 1988년 1월 1일부터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새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2018년부터 법정 최저임금(시급)을 2017년 대비 16.4 대폭 인상한 7,530원으로 고시했다.

2019년에도 금년대비 10.9% 인상한 8,350원으로 고시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바닥 경제가 침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임금만 올렸다며 소상공인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학자들조차도 서로 엇갈린 평가를 내 놓고 있는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이 안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필자는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소상공인들이 더 이상 못살겠다고 주장하는 이면에는 ‘최저임금 상승’ 보다도 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는 대기업의 횡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

아는 바와 같이 대기업들이 전국의 골목상권까지 장악해 버린 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일례로 거리마다 산재한 편의점들의 대부분은 거대자본을 가진 기업들이 펼쳐놓은 매장에 불과하다.

그럴듯한 커피전문점, 음식점들도 많은 수가 개업 단계부터 운영, 결산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예정된 매뉴얼대로 운영하고 있으며 일사불란하게 조직화되어 있다.

이런 딱 맞춰진 상황에서 최저임금 인상은 틀림없이 고통스런 일이 되었을 것이다.

영세 자영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임대료 등이 너무 과도하게 비싸다는 점이다.

임대 기간이 끝나면 경제성장에 맞춘 상식적인 임대료 인상은 어디에도 없다.

두 배 세 배 막무가내로 늘어난 임대료 앞에서는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의 시급을 올린다는 것은 소상공인들의 간을 쪼이고 있는 것처럼 아플 수밖에 없다.

이미 큰돈은 대기업이나 건물주의 손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 몇 푼 남은 푼돈을 또 쪼개서 시급 노동자 임금을 올려주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 아니겠는가?이렇듯 노사 간의 임금협상, 최저임금제 등을 놓고 해마다 팽팽한 논란이 일어나지만, 결과는 언제나 별 것 아닌 ‘현재 상태의 지속’이란 선택을 하고 만 것이 지금까지의 경제정책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구조적인 개혁을 하겠다고 하였지만, 이해 당사자들의 눈치 앞에서 늘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인간 사회에서 ‘먹고 사는 것’처럼 중요한 문제가 없는데, 일시적인 혼란이나 논쟁이 두렵고 귀찮다 하여 늘 피하고 말았다.

안재성의 『풍요와 거품의 역사』를 읽다 보면, 세계사적으로 변곡점을 이루었던 대부분의 굵직한 사건들의 이면에는 예외 없이 ‘돈이 지배한 광기와 욕망’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 대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까지 필자는 프랑스 시민들이 민주적인 가치를 열망하면서 참정권을 요구한 혁명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돈의 광기’가 불러온 사건의 하나였다.

그렇다고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었으면 한다.

1775년 미국에서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막대한 군수물자와 수만 명의 병력을 미국에 지원하고 나서 재정적 위기에 빠진다.

악화된 재정은 국채발행으로도 어찌해 볼 수가 없게 되자, 마지막으로 꺼낸 카드가 바로 '증세'였다.

이는 곧 국론 분열을 초래했다.

즉, 누가 세금을 더 낼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에는 성직자와 귀족, 시민계급(부유한 시민을 통칭하는 부르조아)의 세 계층이 있었는데, 그들은 소위 ‘삼부회’소집하여 열띤 논쟁을 이어간다.

시민들은 성직자와 귀족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성직자와 귀족들은 시민들이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단 1원도 세금을 내지 않겠다.

’는 성직자와 귀족들의 버티기는 프랑스를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회오리로 몰아넣었다.

이들에게 대항한 시민들에게서는 결국 헌법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루이 16세는 이는 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여 군대와 무력을 동원하여 진압하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가난한 민중들인 ‘상퀼로트(Sans-culotte: 긴 바지를 입은 근로자들이라는 의미)’들을 선동하면서 왕과 귀족의 사치를 악의적으로 과장해서 퍼뜨리고, 지금까지 논의되지도 않았던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를 높이고 총을 거머쥔 채 거리고 쏟아져 나왔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라는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왕비의 망언도 시민들이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왕과 귀족,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 등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필자가 이 대목에서 ‘프랑스 대혁명’을 운운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먹고 사는 문제는 단순한 것 같지만 항상 인류사의 변곡점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가 많이 어렵다고 한다.

이럴수록 상생의 지혜가 모아져야 한다.

한때 성장주도의 경제정책이 큰 의미가 있었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물론 노동의 난이도와 전문성을 무시하는 거도 아니다.

그럼에도 똑 같은 시간의 일을 하는데도 누구는 귀족처럼, 누구는 평생 동안 일해도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면 그리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우리의 경제적 위상에 비추어 볼 때, 여전히 시급 1만원도 못 받는 노동자들의 삶이 평안하지 않다면 이것 또한 큰 사회문제다.

서민들의 소득이 늘어야 소비가 확대되고, 소비가 확대되어야 기업이 활성화되는 선순환구조 아닌가.

정부에서는 증상처방에 급급하는 대증요법을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서민도 잘 살고 기업도 성공하는 나라가 됐으면 한다.

/송일섭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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