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열정으로 "나는 죽염에 미쳤다"

<5>조선 3대 명주 ‘죽력고’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식품명인 48호 송명섭

“죽력고 몇 대째 전수자냐, 언제부터 빚기 시작했느냐는 중요하지도,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민족의 술, 죽력고를 문화적 가치로 보며 공유하고 즐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육당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이강주, 감홍로와 더불어 조선3대 명주로 꼽은 죽력고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48호이자 전북무형문화재 제6-3호인 태인양조장 송명섭 대표.

‘죽력고를 언제부터 빚기 시작했느냐’는 첫 질문을 다 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을 문화재로 지정해 놓고 왜 기술자로 격하시키려고 하느냐’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 의미는 한참 뒤 죽력고가 어느 개인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 전통문화라는 송 명인만의 확고한 원칙과 술에 대한 철학에서 찾을 수 있었다.

송 명인은 “문화라는 것은 혼자 갖고 있는 게 아닌 여러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며 “죽력고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어느 집에서나 빚던 술로, 어느 가문만의 술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맥이 끊기면서 명맥을 이어오는 이가 나인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즐겼던 술이었다는 명인의 말처럼 죽력고는 고전 ‘춘향전’에서 춘향이 자신의 집을 찾은 이몽룡에게 주안상을 올리는 데 그 술 중에 버젓이 이름을 올린 술이었으며, 우암 송시열이 자신의 산문집 ‘송자대전’에서 진시절미(眞是絶味)라고 극찬한 술이기도 하다.

하지만 빚는 과정이 까다로우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등 한반도가 격변의 시대를 지나면서 죽력고는 그동안 쌓아온 명성과 달리 명맥이 거의 끊기게 됐으며, 지금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송 명인의 손에서만 빚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송 명인은 스스로를 “죽력고라는 문화를 후세에 이어주는 매개체일 뿐”이라며 “이를 위해 자신을 명인으로, 문화재로 지정한 것 아니겠냐”고 강조했다.

명인과 무형문화재로서의 역할에 대해 소신이 확고한 것이다.

송 명인과 죽력고의 인연은 한약방을 했던 외조부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치료보조제로 사용하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비방을 모아 여러 가지 약술을 빚었는데 죽력고도 그중 하나였다고.

실제 구한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이 남긴 책 중 동학농민전쟁을 기록한 오하기문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서울로 압송당하면서 부상당한 몸을 회복하기 위해 죽력고를 찾았다고 적혀 있다.

이후 이를 빚는 법을 전수한 어머니 은계정 씨는 태인양조장을 운영하는 송 씨 가문으로 시집을 오면서 죽력고의 명맥을 이어갔으며, 어린 시절부터 이런 모습을 어깨너머로 본 송 명인은 자연스럽게 이를 이어받게 됐다.

송 명인은 “현대의학이 발전하기 전 민초들의 삶에서 술은 약으로 사용됐는데 이 중 대나무 액을 이용한 죽력고가 가장 유용했다”며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내린 것도 중력고였다.

이를 통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면서 죽력고에 얽힌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은 듯 전했다.

하지만 명인의 담담한 어조와 달리 죽력고는 자연과 기다림이 빚어낸 술로, 제조공정이 유난히 길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어지간한 주조 장인들도 빚어낼 수 없다.

오죽했으며 흔하게 빚어 냈다던 술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겠는가.

그렇다고 단순히 혼자만 이를 빚어내고 있다고 해서 명인과 무형문화재에 이름을 올린 것은 아니다.

이를 제대로 복원하기까지, 널리 알려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을 때까지 생활고까지 감내해야만 했던 송 명인의 고집과 열정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

죽력고의 핵심인 죽력은 청죽을 마디마디 자르고 여러 조각으로 쪼갠 뒤 항아리에 넣은 뒤 3~4일 불을 쬐면 대나무에서 나오는 진액을 말한다.

여기에 솔잎과 대나무 잎, 생강, 계심, 석창포 등을 담가 소줏고리 안을 채운 뒤 전통방식으로 빚어내 30일간 숙성한 가주를 끓이는 솥에 얹으면 끓어오르는 술이 이를 통과하면 드디어 죽력고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인내의 시간을 겪으며 오랫동안 빚어온 술이어서 그런지 죽력고 빚는 법을 묻는 이들에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과정을 알려줘도 그 맛과 향은 명인을 따라올 자가 없다.

더욱이 송 명인이 빚는 술에는 그만의 원칙과 소신, 전통문화가 함께 담겨 있는 것 같아 더욱 특별해 보인다.

이는 죽력고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송명섭 막걸리’ 역시 마찬가지다.

막걸리 마니아 사에서 ‘송명섭 막걸리’를 모른다는 것은 아직 막걸리 맛을 모른다는 말이 있을 만큼 그의 손에서 빚어지는 모든 술은 ‘명주’라고 단언해도 될 것 같다.

송명섭 명인은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 일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명인들이 제대로 명맥을 전수해 갈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만들어지길 바란다”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나는 기술자가 아닌 죽력고 명인이자 문화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6>천년고찰 개암사 죽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도내 최초 수산명인 3호 정락현

우리나라 최초의 죽염명인이자 전북에서 유일한 수산명인 3호인 (주)개암죽염식품 정락현 대표.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강산이 3번 바뀌는 동안 오로지 죽염만을 생각하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다.

그야말로 죽염 외길 인생이다.

스스로를 ‘죽염에 미친사람’이라고 거침없이 소개하는 정 명인은 죽염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산업과 접목시켜 죽염산업의 새장을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와 죽염은 인연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무렵 폐결핵과 피부질환이 심해져 집 밖을 나갈 수 없게 된 명인.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였기에 당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시골 소년이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가 집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집 인근의 천년고찰 개암사뿐이었다고.

정 명인은 “그곳에 머물며 예로부터 불가의 비상약이라 할 수 있는 ‘죽염’을 알게 됐고, 직접 죽염을 만드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빼앗겼다”며 “죽염으로 양치도 하고, 이를 넣어 만든 음식만 먹고,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피부질환이 사라지고 폐결핵도 완치돼 다시 학교에 가게 됐다”면서 옛일을 회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 도피해 찾은 개암사의 죽염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죽염과 관련된 민간요법과 의학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호기심일 뿐 죽염에 인생을 걸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이후 대학교에 진학해 현대종합상사에 입사했지만 돈 버는 재미보다 죽염을 공부하는 재미가 더 컸기에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1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와 개암죽염식품을 설립했다.

정 명인의 죽염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패기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어깨너머로 배우고 불가의 비법을 전수한 데다 고서적을 통해 죽염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만의 죽염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녹록지 않은 시간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이때의 고생과 노력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고 개암죽염식품 직원들은 말했다.

현재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의 대다수가 창업 멤버로 명인이 걸어온 길의 산증인이다.

함께 일하는 이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만큼 죽염에 대한 그의 노력과 열정은 끝이 없었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만 가질 수 있는 죽염은 거센 불길을 9번이나 거쳐야 만들어진다.

간수를 5~7년 뺀 미네랄이 풍부한 곰소소금에 깊은 산속에서 퍼낸 황토를 녹인 지장수와 버무려 5년 이상 된 재래종 왕대나무에 다져놓고 황토 토굴에서 꼬박 이틀간 구워낸다.

이를 꺼내 빻은 뒤 다시 새 대나무에 넣고 불을 지피는 과정을 8번이나 반복한다.

마지막 과정은 특수 제작한 용융로에서 거치는 데 이때 온도는 무려 2천도다.

이를 위해 한 번 끓인 송진을 넣으며, 명인만의 노하우이자 첫 번째 비법 역시 이 과정에서 나온다.

5년 된 대나무를 소나무와 함께 넣어 불을 지핀다는 것이다.

“대나무 안에 얇은 막이 있는데 이를 죽여라고 부릅니다. 다른 말로는 산소황으로 이는 대나무에만 들어 있어요. 이 천연유황 성분이 소금에 더 스며들게 하기 위해 대나무를 태우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랫동안 연구해 찾은 나만의 노하우입니다.”

이처럼 붉은색을 띤 자죽염(2천도 이상, 그 이하는 흰색의 죽염)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45일이 소요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 명인은 완성된 죽염을 물을 한 번 더 녹이는 과정을 거친다.

미세한 맛의 차이로, 이 과정 역시 개암죽염에서만 볼 수 있다.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월등히 뛰어난 데 굳이 이런 과정이 필요 하느냐는 질문에 명인은 ‘죽염에 미쳐 봐요.

미세한 차이도 놓치기 싫어질 테니’라고 말했다.

죽염의 가치를 최상의 품질을 통해 높인 것만은 아니다.

민간요법의 굴레를 넘어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죽염치약을 개발한 장본인으로, 여전히 LG생활건강에 죽염을 26년간 납품해 오고 있는 것.

죽염산업의 기반을 다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명인은 이에 그치지 않고 죽염산업을 더욱 활성화시키기 위해 수출이라는 또 다른 길을 개척해 가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식품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죽염이 해외시장에서도 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죽염에 대한 사랑과 끊임없는 노력, 식지 않는 열정이 결국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죽염명인으로 만든 것으로, 아무리 바빠도 죽염을 굽는 일만큼은 여전히 직접 챙긴다.

함께한 세월이 있기에 직원들에게 이를 맡길 수도 있지만 그는 “못 믿어서가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며 “자연이 내어준 재료에 시간과 정직함을 더한 죽염은 그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귀하고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직접 선물하고픈 마음”이라고 전했다.

이어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며 “전통방식 그대로 얻어낼 때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서 명인으로서 그 전통을 이어가는 데 소홀하지 않겠다고 단호한 게 말했다.

이를 위해 고된 일이지만 옛 방식 그대로 묵묵히 죽염인생을 걸어갈 전수자를 키우는 일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가장 한국적인 식품인 죽염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 홍보는 물론 죽염산업의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죽염을 통해 새 삶을 얻었기에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소금 같은 존재, 아니 죽염 같은 존재, 즉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 온 것입니다. 명인이라는 무게감을 안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남은 인생도 죽염에 맡겨야지요.”

/김성아기자 tjd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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