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고 변하지 않는 홍삼인생 '송화수'

<9>‘순창고추장’이 가치를 인정받는데 일등공신인 식품명인 36호 문옥례 ‘순창’=‘고추장’.

순창군이 뚜렷한 일교차와 높은 습도로 효모균 발효에 최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어 고추장 담그기에 최적의 지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리적 이점을 기반으로 고추장을 하나의 산업으로, 지역의 경제적 활성화의 근간을 다져준 주인공에 대해 아는 이들은 드물다.

그는 바로 300여 년간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고추장 맛을 이어가고 있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36호 문옥례 할머니다.

고추장으로 전국 최초 명인에 이름을 올리며 순창고추장의 가치를 한층 더 끌어올린 일등공신으로, 순창 고추장의 맛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며 아예 지역명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아마 문옥례 할머니가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순창고추장 민속마을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민속마을 일대에서 문 명인은 순창고추장의 대모라 불리고 있다.

한평생을 고추장과 함께해 온 문 명인.

다른 명인들도 그렇듯이 그 역시 고추장과의 인연은 운명이자 우연이다.

구순을 바라보는 문옥례 명인의 세대에서 장을 담그는 일은 집안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일이었기에 운명이었으며, 우연한 기회에 문 명인의 장맛이 알려지면서 오늘의 자리에, 순창고추장의 명성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문옥례 명인이 고추장을 본격적으로 담그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 무렵 삼천석지기 부잣집 조 씨 가문의 둘째 며느리로 시집을 오면서부터다.

조 씨 집안의 장은 300년 전 조선조 숙종말 전남 영광에서 순창으로 이주해 온 창령을 본관으로 한 조 경방이 시초라고 한다.

그때부터 집안의 장이 대대로 전해져 왔으며, 문 명인은 시어머니로부터 전수 받아 6대째다.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지역에서 300여 년의 세월을 유지해 온 장맛.

하지만 타고 난 손맛이었는지 명인이 만든 고추장은 남달랐다고 한다.

명인이 만든 고추장을 맛본 이들이 너도나도 담가 달라고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문 명인은 “맛있다면서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 줄 수가 있느냐. 나눠 먹는다고 생각하고 처음에는 나눠줬다”며 “그런데 알음알음 찾아와 고추장을 좀 담가 달라고 주문을 하는 등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감당이 되지 않았다. 집안의 장맛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 맛있다고 하니 더 많은 사람에게 맛보이기 위해 1962년 고추장상회를 설립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것이 고추장 사업화의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문 명인이 담근 고추장을 맛본 이들은 하나같이 다른 고추장과 달리 감칠맛이 풍부하다고 말을 한다.

그 맛의 비법은 재래간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해서 메주, 고추, 찹쌀 등 어느 재료 하나 소홀하게 다루는 법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소금에 가장 신경을 쓴다고.

이는 사람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도 중요한 요소지만 고추장뿐만 아니라 장류의 맛을 결정짓는 주요 요인이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까다롭게 골라 준비한 재료와 오랜 세월을 거쳐 명인에게로 전해진 비법, 최적의 조건이 만나 만들어졌기에 고추장상회 설립 이후 명인의 고추장 맛은 전국구로 입소문이 났다.

이후 이웃사람들도 고추장 상품화에 뛰어들기 시작했으며, 거대 식품기업도 순창고추장을 브랜드화해 대량생산에 들어가면서 순창=고추장이라는 인식이 뿌리를 내리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최초로 고추장을 소개되면서 1980년대 수출길에 오른 데다 백화점에도 입점 됐다.

전례가 없던 일로 이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대단한 일로 회자되고 있다.

이후 문옥례가 곧 고추장으로 통하다 보니 상호를 순창문옥례식품으로 변경, 꾸준히 고추장 산업을 활성화 시키면서 순창 지역경제에도 힘을 보탰다.

이런 노력은 물론 한식의 세계화에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도 공로를 인정받으며 지난 2010년 대한민국의 전통식품을 대표하는 식품명인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순창고추장의 수백 년 역사의 첫 명인으로, 이를 통해 그는 순창고추장의 가치를 한층 더 높였다.

이제는 문 명인의 뒤를 막내아들 조종현 씨가 이어가고 있다.

그는 “어머니는 정말 평생을 고추장과 함께 해왔다.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맛을 기본으로 시대에 맞는 고추장 연구에도 열정을 쏟아왔다”며 “그런 노력을 누구보다 알기 때문에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장이기도 한 만큼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문 명인은 “우리 고유의 전통발효식품인 고추장을 계승해 나가기 위해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제품을 늘 개발해야 한다”며 “내 뒤를 걸어갈 전수자에게 넘기는 숙제이기도 하다.

한식과 고추장 세계화를 위해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개념의 소스를 개발해 나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고 전했다.

이어 “이런 정신이 잘 이어갈 수 있도록 명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0>진안 홍삼의 가치를 높인 식품명인 44호 송화수 ‘홍삼’으로 전국구 유명세를 얻은 ‘진안군’.

다른 지역에서도 홍삼이 제조·가공되고 있지만 명실공히 진안군이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홍삼은 진안군의 경제적 활성화와 경쟁력을 강화해 줬을 뿐만 아니라 진안에서 재배되는 인삼의 가치와 품질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물꼬를 터준 일등공신이다.

사실, 진안은 평야가 아닌 고원으로, 오염되지 않은 토양과 고산성 기후 덕분에 생태적 선택성이 강한 인삼의 생육 환경에 최적인 지역이다.

이에 진안 인삼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품질이 우수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삼의 주산지로 알려진 금산, 강화, 풍기, 포천 등에 비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를 삼신인삼가공 영농조합법인 송화수 대표가 홍삼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제 가치를 찾아 준 셈이다.

송화수 대표가 바로, ‘홍삼 할아버지’라 불리며 대한민국 식품명인 44호로 지정받은 국내 유일의 홍삼 장인이다.

진안 홍삼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그는 평생을 홍삼과 함께했다.

홍삼을 위해 살아온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든이 훌쩍 넘은 송화수 명인과 홍삼의 인연은 언제부터라 할 것도 없지만 굳이 시작점을 찾자면 조부가 장수군 천천면에서 경작했던 약삼포라 할 수 있다.

약삼포는 집안에서 약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인삼을 재배하는 작은 받을 일컫는데 명인의 할아버지가 황해도 연백과 개성을 오가며 일찍이 인삼재배에 관심을 가지면서 마을에서 처음으로 인삼 재배를 시작했다.

송 명인은 “7~8살 때부터 약삼포를 따라다녔고 할아버지가 시루에다가 재배한 삼을 쪄서 말리는 것을 봐왔다.

보기만 한 게 아니라 옆에서 잔심부름을 정말 많이 했다”면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이어, “당시 홍삼은 효능보다는 보관 때문에 만들었다. 인삼을 그대로 말리는 백삼은 1년이 지나면 좀이 슬고 산패가 진행되는데 홍삼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후 약삼포는 자연스럽게 송 명인의 아버지가 물러받았으며, 장수보다 재배환경이 좋은 진안으로 옮기게 됐다.

하지만 당시에도 홍삼에 모든 것을 받힐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며 그저 시간이 낼 때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도와 인삼 재배와 홍삼 만드는 일에 손을 보탰을 뿐이었다고.

그런데 운명이었는지 진안공무원이었던 30대 중반 무렵 전북인삼협동조합이 생기면서 최연소 전무이사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곳에서 인삼 행정 업무와 함께 자연스럽게 홍삼 가공 기술까지 체계적으로 익히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인삼·홍삼과 함께 해왔던 만큼 그 속도는 빠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자리가 자리인 만큼 지역에서 재배되는 품질 좋은 인삼의 부가가치를 더욱 높이고자 홍삼 연구에 본격 뛰어들게 됐다.

송 명인의 ‘경험’과 ‘체계적인 가공기술’, ‘의지’라는 삼박자가 맞으면서 진안 홍삼의 위상도 나날이 높아져 갔던 것이다.

그러다 1996년 홍삼전매제가 폐지되면서 그는 은퇴하고 여가를 누릴 나이에 인생 3막을 열게 된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홍삼 가공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당시 지역의 모든 관심이 그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진안과 홍삼 관련 해외바이어들 사이에서 ‘홍삼박사’로 통했던 그가 전국구 명성을 얻은 것은 2010년 전국 최초로 홍삼제조기와 증삼방법에 관한 발명특허를 등록하면서다.

이는 최상품의 홍삼을 만들기 위한 그의 수십 년의 노력이 응축된 결과물로, 이는 증삼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은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송 명인은 “수삼을 홍삼으로 제조할 때 고유 성분이 유실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아무래도 증삼할 때 스팀으로만 쪄내다 보면 휘발성이 강한 사포닌이 날아가고 습기로 씻기게 된다”며 “이에 인삼을 쪄낼 때 증기만이 아닌 열을 가해 내부의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삼의 좋은 성분을 다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약삼포를 놀이터 삼았던 그였기에 홍삼 증삼방법 개선에 앞서 인삼 재배 농법도 바꿔놓았다.

이는 인삼 환원순환농법으로, 버려지는 인삼대에서 약용 성분을 축출해 그것을 다시 자라는 인삼에 투입하는 것으로, 친환경 재배농법이라 할 수 있다.

좋은 홍삼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삼이 중요한 만큼 이런 노력은 당연한 것이라고 송 명인은 말했다.

이처럼 진안군이 홍삼의 1번지로 불리게 된 것은 송 명인이 있기에 가능, 진안 홍삼이 곧 송 명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며 홍삼의 품질 향상을 위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그가 ‘명인’으로 ‘전설’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이런 명성에도 송 명인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으며, 지금도 인삼을 재배하고 홍삼을 만드는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면서 홍삼의 품질을 향상 시키고 진안 홍삼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의 뒤를 이어가고 있는 송인생 씨는 50여 년을 오로지 홍삼만을 위해 살아온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묵묵히 송 명인이 지켜온 원칙과 소신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송 명인은 “명인이라고 인정받기까지 주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해서 홍삼 명인은 나의 개인 것이 아니다”며 “그저 진안군을 대신할 뿐이다. 해서 진안홍삼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홍삼 제조 기술을 널리 알리고, 지금까지 그랬듯이 정직하게 이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아기자 tjd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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