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으로 남한과 북한이 심리적으로 훨씬 가까워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한다면 '남과 북이 서로 오가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도 커졌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해 바람직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점에서 냉철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북한의 김 위원장은 비핵화를 실천할 수 있을까? 

남한이 아닌 북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핵심 목표는 정치적 생존이다. 이를 위한 최상의 길은 무엇일까? 개방과 개혁을 통해 경제적 부흥을 이루는 것이다. 경제발전이 없다면 그의 정치적 생존은 불투명하다. 주민들 궁핍 상태가 지속하면 공포정치를 펴도 정권 유지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지난해 기준 146만4천 원으로 남한 3천363만6천 원의 4.4%였다. 남한-북한 1인당 국민소득 격차가 23배나 되는 셈이다. 앞으로 소득 차이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이런 북한이 생존할 수 있을까? 북한 김 위원장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남한의 경제다. 이런 점에서 경제 부흥에 대한 김 위원장의 의지는 당연하고 절박한 것이다. 

북미 협상이 원만히 진행되고, 북한이 경제발전을 위한 개방과 개혁에 나선다면 김 위원장에게 핵무기는 필요 없을까?. 오히려, 그는 생존을 위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개혁과 개방의 과정에서 정치·사회적 혼란은 불가피하다. 시장경제 시스템이 급속히 확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내부 단합을 이뤄내는 데 도움이 되는 외부의 적도 모호해지다 보니 주민 통제도 수월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북한 내 권력을 바꾸거나 공격하려는 내부-외부의 시도가 생길 수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강국들이 북한을 특별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없애는 즉시 이들 나라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작고 궁핍한 나라의 권력자로서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김 위원장은 경제 부흥에 성공해 정권의 안정을 실현하기까지 상당 기간 핵무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 물론, 북미 간에 김정은 정권을 보장하는 식의 합의가 이뤄질 수 있다. 그래도 김 위원장은 안심을 못 한다. 나라 간의 합의나 협정 등이 뒤집히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1994년 10월 중간선거에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북-미 제네바 합의를 끌어냈다. 그러나 선거결과, 국회는 여소야대로 바뀌었다. 이후 미국의 의회는 북한 경수로에 핵심부품을 공급하는 것을 반대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는 데 차질이 생긴 것이다. 더욱이 부시 행정부는 이전 정부가 이뤄낸 제네바 합의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제네바 합의 파기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 등이 불거졌기 때문이지만 미국에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험을 했던 북한은 파키스탄처럼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길을 선호할 가능성이 있다. 파키스탄은 1998년 핵실험 성공 이후 실험을 자제해왔으며 이제는 국제사회에서 핵보유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북한도 미국과의 협상 채널을 유지하면서 경제제재 수위를 조금씩 허문다면 수년 후에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 상황으로 봐서 이런 시나리오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미-중 무역 전쟁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는 이미 허술해진 상태다. 북한 제재의 핵심적 키를 잡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북한 무역의 90%가 중국과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한에 치명적인 제재를 원하지 않는다. 북한 체제의 붕괴가 자국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가장 큰 위협수단인 군사적 옵션도 현실성이 떨어지고 있다. 군사적 공격이 한반도 전쟁을 초래함으로써 막대한 인명피해를 낳을 수 있어서다. 게다가 김 위원장은 남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정상국가 지도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정상적인 국가로 변모하는 북한에 미국이 무력 공격을 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북한의 김 위원장으로서는 1년 전보다 비핵화에 대한 압박감이 줄어들었다고 봐야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입장에서는 어떨까? 북한이 진정한 비핵화를 실현하면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그러나 북한이 핵 관련 리스트를 내놓고, 폐기하고, 특별사찰을 받아도 비핵화가 완성됐다고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핵무기를 완성한 나라가 다시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은 표면적으로 북한의 완전 비핵화를 추진하되 결국은 현실적이고 전략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의 승리와 2020년 재선에 성공하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제스처를 끌어냄으로써 선거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절실하다. 어쩌면 트럼프 대통령은 군축 수준에서 만족할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미국 일각에서는 남한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에 핵무기가 어느 정도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주한 미군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 명분 확보를 위해서는 북한 내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한으로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 우리의 안보와 생명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북한이 파키스탄 모델로 진행할 가능성, 미국이 군축 수준에서 만족할 가능성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

/윤근영 언론인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