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은 1894년 2월15일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만석보 물세의 부당한 징수에 시달린 농민들이 이평, 말목장터에 모여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백성들을 풀어주었다.

이후 군기고를 열어 창칼을 탈취하고 쌓아둔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백산에 진을 치자 도망친 조병갑 군수 체포령을 내리고 장흥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도록 하면서 새 군수로 부임한 용안현감 박원명은 민심수습에 전력을 다하며 해산하고 귀농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해 전봉준은 해산하고 물러갔다.

문제는 박원명 군수와는 달리 이용태 안핵사는 봉기에 가담한 농민들을 잡아다 가두고 재물을 몰수하는 등의 횡포를 부렸다.

이용태의 횡포에 농민들은 정부를 불신하며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교도 손화중과 동학교도들이 가세하면서 조직화하였고 조병갑과 같이 횡포를 부리는 이용태를 추방하고 5월30일 전주에 입성해 12일간의 전주부성을 점령하자,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파병되었고, 국가위기를 자아낼 것을 우려해 조정에서 이원회를 순변사로 임명하고 홍계훈과 함께 고종의 효유문을 전달하면서 문제가 있는 책임관헌 처벌을 시행했다.

전봉준장군에게 급박한 정세 설명과 자진 해산하면 동학군은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해 6월11일 북문을 열고 철수를 하였던 것이다.

제폭구민(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함), 보국안민(나라님을 도와 국정을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기치로 시작한 동학혁명이 드디어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성 점령 12일간의 전투를 통해 동학혁명군과 관군 양측 모두 수백명씩 죽이고 상상할 수 없는 혈투를 벌이게 됐다.

기관총, 포, 소총 등으로 무장한 관군과 죽창, 몽둥이를 들고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시지’를 외우며 관군에게 달려들어 혈투를 벌인 동학혁명군은 홍 계훈휘하 군사들이 6월1일 완산, 다가산, 유연대 일대에 올라서서 전주부성을 내려다보면서도 감히 공격하지 못한 것은 동학혁명군의 수적 우세와 경기전, 조경묘 파괴에 대한 염려로 성내 전투를 피하는 사이 동학군이 전주성을 나와 투구봉을 점령하고 완산 칠봉으로 진격함으로써 맷골에서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동학군은 죽창과 몽둥이, 화승총으로 무장하였으나 관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무기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주문을 하며 돌진했다.

동학군이 동학군 시체를 넘고 또 넘고 하면서 진격, 또 진격을 하였지만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만큼은 관군이 따라 올 수 없었다.

숭고한 동학혁명전신을 기리기 위한 동학혁명기념일제정에 동학혁명관련 단체들이 서로의 주장으로 몇 년째 정하지 못하는 현실은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도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지도 못한 것이라 주장한다.

어찌 보면 일본의 터무니없는 군사 동원이 성공 할 수 있던 동학혁명을 실패로 만들고 청일전쟁의 실마리를 제공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 후 36년간 식민통치를 한 일본의 기록이 김 개남 장군 처형장이 초록바위에서 서교장이란 기록으로 남아 장군의 사형장이 확실하지 않다는 동학연구가들에게 감히 묻고 싶다.

문화말살과 살육을 저지르고 자기들의 욕심을 위해 조선을 침범한 일본의 김개남 장군의 사형장이 서교장이라는 기록으로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조선의 기록을 우산하고 부족한 부분을 참고로 하여 야 할 동학혁명사 기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김개남 장군 사형장이 일본 기록 서교장이란 문헌에서 발견되기 전에는 장군의 사형장은 초록바위라 하였는데, 아니다.

진실을 알아야 한다며 의견이 나뉘는 모습에서 동학혁명 기념일 제정도 결국엔 지역 이기주의 발동으로 인해 단체들의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때문에 몇 년 째 제정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과연 동학혁명의 정신이 동학혁명 연구가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민심은 천심이다, 조병갑의 폭정과 수탈, 징세에 분개한 농민들도 조정의 말을 믿고 해산하였으나 이원회 안핵사가 민심과는 다르게 조병갑과 같은 행세를 하다 결국엔 농민들의 원성이 들불처럼 번진 제폭구민, 보국안민을 기치로 반 외세, 반 봉건을 외치며 싸웠다.

피 흘려 쟁취한 민,관 협의로 이루어낸 집강소 설치는 동학혁명 희생자들의 정신을 모은 결과물이다.

희생자들의 뜻을 기릴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을 각기 주장하는 것이 동학혁명 희생자들의 정신에 누가 되지 않는지 모두 생각해 시점이다.

/박영진 한중문화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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