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유럽만큼 오래됐다'고들 말한다. 유럽은 그만큼 숱한 전쟁을 치렀다. 또 유럽은 지질학적으로 노년기에 이른 늙은 땅이다.

그러나 여행객은 느낀다. 유럽은 젊은 여성처럼 우아하고 아름답다. 카메라 렌즈가 향하는 곳마다 그림이 된다. 도시와 시골은 잘 정돈돼 안정감을 준다. 행인은 흑백, 남녀 할 것 없이 당당하고 예의 바르게 보인다. '유럽'이라는 이름은 제우스 신이 반한 공주 '유럽'에서 왔다. 

유럽은 십자군 전쟁에서 2차 세계대전까지 큰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한국은 외세 침략이 많았다고 하지만 조선 왕조가 세계사에 드물게 500년을 유지한 데서 보듯 유럽과 비교하면 전쟁이 잦지 않았다. 유럽에 분쟁이 많았던 것은 압도적 강대국 없이, 여러 나라가 옹기종기 국경을 맞대고 경쟁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2차 대전 뒤 서유럽에 70년 이상 전쟁이 없었다. 유럽사에 흔치 않은 일이다.

'전쟁없는 유럽'의 1등 공신은 유럽연합(EU)이다. EU는 전후 석탄과 철강을 공동 관리하던 국제기구에서 출발했다. 무기 재료인 철과 동력원인 석탄은 전략물자였다. EU 영토는 어느덧 발칸반도까지 확대됐다. 다루는 분야는 경제 전반, 외교, 내무, 사법으로 넓어졌다. 단일 시장과 화폐가 '발명'됐다. 단독 주권국가에 익숙한 우리에게 국가연합인 EU의 작동 원리는 잘 와닿지 않는다.

EU 건설의 아버지들은 회원국들이 공동 이익을 추구하면 번영과 평화가 따라올 거라 믿었다. 지금까지 회원국 사이에 전쟁이 없었으니 평화 실험은 성공했고, 믿음은 현실이 됐다. 

 
 

유럽 재정위기, 영국 탈퇴, 난민 사태 때문에 EU의 가치를 낮춰 보는 눈길도 있다. 그러나 EU가 없었다면 유럽은 갈등과 반목이 지금보다 더하고, 어쩌면 전쟁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전쟁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EU가 있기 때문이다. 

EU는 사실 전쟁을 모태로 태어났다. 역사상 최초의 세계 패권자였던 유럽은 1, 2차 대전 후유증으로 약체가 됐다. 패권 상실 앞에서 생각해낸 게 여러 나라가 힘을 합하는 정치 공동체다. 새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 틈에서 그나마 세력과 영향력을 완전히 잃지 않는 방법이었다. 

EU 출생의 또 다른 비밀은 미국이다. 미국이 소련의 위협을 막아줬기 때문에 유럽은 안보에 신경 쓰지 않고 경제발전과 통합에 매진할 수 있었다. 미국-유럽 군사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그런 맥락에서 생겼다. 유럽 통합은 미국이라는 우산 아래서 가능했던 거다.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 전 유럽을 순방해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지지를 호소했다. 북한 비핵화가 진척되고, 제재 해제가 비핵화를 촉진한다고 판단되면 EU는 제재 완화나 해제에 찬성할 것이다. EU는 오래전부터 한반도 평화를 지지해왔기 때문이다. 북한 핵 개발 반대 입장이 확고하다.

유럽은 북한에 대해 미국처럼 국가전략 차원이 아니라 평화 우선 외교를 편다. 민주주의, 인권을 중시하는 이른바 가치 외교다. 물론 미국에 맞서는 독자노선을 걷지는 않는다. 이는 패권을 추구할 수 없는 EU의 한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지만 자유, 평화,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유럽의 사상, 지적 전통을 보여주기도 한다. EU는 1995년부터 지금까지 23년 동안 북한에 1억8천만 달러(약 2천억원)를 지원했다.

유럽 통합 효과는 분명하다. EU 경제력은 미국보다 크다.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GDP 중 약 3분의 1이다. 무역량은 중국을 제치고 압도적 1위다. 수출은 전 세계 수출량의 약 40%다. 통합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자본주의 시장을 낳았다. 

유럽 제국·식민주의가 할퀸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적 정치제도, 경제적 풍요 등 세계가 누리고 있는 현대문명은 유럽에 빚진 것이 많다. 유럽은 근대 과학, 산업을 일으켰고 민주주의, 자본주의, 법치, 인권, 복지의 가치를 발견하고 제도를 만들었다. 지금의 세계 문명은 유럽의 지성이 뿌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유럽은 지리적으로 멀다. 그 때문에 유럽이 처한 정세, 이룬 성과, 추구하는 가치에 어둡지 않나 모르겠다. 패권을 내주고도 리더십을 잃지 않는 유럽의 지혜, 유럽에서도 예외없이 유효한 미국 패권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이 옳은 좌표를 설정할 수 없다는 건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세계 10위권 경제다. 먹고살기 힘들다며 민주주의, 인권, 복지 등 인류 보편 가치를 외면해도 되는 때는 지났다. 유럽에서 태어난 이 가치들을 더 발전시킬 때 한국은 세계사의 주인이 된다. 유럽 땅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을 중시하는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 아닐까.

/현경숙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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