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이전의 권력주의 사회질서에서는 권력집단이 민중의 생명과 정신을 지배했고, 사회질서를 규정한 법률은 강자가 약한 자에게 내리는 명령이었다.

심지어 권력집단은 자신의 명령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하여 민중에게 병역의무, 납세의무, 복종의무를 일방적으로 강요했다.

이러한 사회질서에서는 삶의 자유는 물론이고 정치자유도 없었고 의무만을 강요받는 일방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러한 일방관계 속에서 돈 없고 힘없어서 핍박받던 민중은 혁명을 일으켜 권력집단이 민중의 삶을 책임지도록 하는 쌍방관계를 쟁취했고, 우여곡절을 겪어오며 자유주의를 현대의 사회질서원리로 받아들였다.

자유주의 사회질서에서 시민들은 사회가 합의한 법률 아래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기초로 사회가 안전하게 세워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 왔다.

법률은 민중위에 군림하는 정부명령이 아니라 정부자체가 법률에 복종해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시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법률을 지지해왔다.

또한 시민들은 자신 위에 아무런 상전도 두지 않았으며 스스로 자기들을 지배하였고 단지 옛날부터 내려온 생활원칙과 규칙들에만 복종하며 살고자 했다.

이러한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권력집단에게는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며 최근에는 촛불혁명에 의한 정권교체의 힘까지 보여준 바 있다.

삶의 장해를 모조리 지워버리고자 자유주의 사회질서를 받아들여 살아오며, 부패한 권력집단을 응징하는 촛불혁명의 힘을 보여줬던 시민들이지만 정작 자신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내 삶을 스스로 보살필 수 있는 정치자유가 결핍됐기 때문이다.

즉 현행의 국회의원선거제에서는 집단 구성원의 숫자가 많더라도 정치대리인을 국회에 보낼 수 없어서 내 삶을 개선시키는 데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일례로 “비정규직이 700만 명이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700만 명인데 국회의원 중 비정규직,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은 한 명도 없으며 농민은 300만 명인데 농사짓는 국회의원은 1명뿐”이기 때문에 이들의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 집단의 삶은 적막강산인 것이다.

사회가 합의한 법률을 시민 모두가 스스로 지지하는 자유주의 사회질서에서는 법률 하나가 잘못돼 있으면 시민의 삶은 고단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시민들의 표심을 100퍼센트 담아 각 사회집단의 정치대리인을 국회에 보낼 수 있는 법률이 마련돼 있지 않으면 일시적 경제성장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 열매가 시민들 각자에게 공정하게 나눠지지 않을 것이며, 정치대리인을 국회에 보내지 못하는 집단들에게는 지금 같은 고단한 삶이 계속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국회의원 선거제 개혁을 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 운동이 야3당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각 정당이 유권자로부터 얻은 득표율만큼 의석수를 가지도록 함으로써 각 집단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정치대리인을 갖게 하여 국민의 삶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힘없고 돈 없어서 삶이 적막강산인 서민들에게는 나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다수당은 소수정당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수당이 유권자들에는 상류층보다는 비정규직, 자영업자, 소상공인, 농어민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 터인데 안타깝다.

다수당은, 사회는 자기 이익만을 아는 소수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상호작용성과 상호의존성을 지닌 살아 있는 부분들로 이뤄진 유기체임을 알아야 한다.

다수당은 자기 이외의 타인의 소망과 이해도 돌봄이 없이 자기의 세력만 쓰는 사람이 가지는 비사회적(이기적) 자유를 누려서는 안 된다.

정치자유는 다른 집단의 정치자유를 희생시켜서 얻는 자유가 아니라 함께 정치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다수당은 각 사회집단이 정치대리인을 국회에 보낼 수 있는 정치자유를 억압하는 가해를 연출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정치자유를 제지할 권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더불어 비정규직, 자영업자, 소상공인, 농어민 및 청년들이 자신의 정치대리인을 국회에 보내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정치자유를 무시함으로써 기득권층을 옹호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모두가 현재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운동에 동참해 촛불혁명을 제대로 완수하는 지름길을 열어주시길 바란다.

/최석규 전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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