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동무 씨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 동무 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 딱히 놀 거리가 없었던 어릴 적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가면서 화음과 동작을 맞춰 즐겨 부른 노래다.

왜 그때의 씨동무들은 허구 많은 밭 중에 미나리 밭에 앉았을까? 지금도 여전히 궁금하지만 그 답은 모른다.

다만 지금도 미나리를 먹을 때면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재롱이 추억 속에서 은근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논이나 습지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듯한 미나리에 관심을 둘 나이도 아니지만 헛디뎌 탁한 흙탕물 속 미나리 밭에 발이라도 빠지고 집에 들어올라치면 ‘칠칠치 못한’ 아이로 꾸지람을 듣곤 했던 원성 어린 곳이 동네 미나리꽝이었다.

어른들이 생선 탕을 먹는 데 정작 생선보다 미나리 같은 채소를 더 먹는 이유를 아는 데는 가정의 주부가 된 후였다.

 ‘미나리를 뜯는다’라는 뜻을 가진 ‘채근(采芹)’이 조선시대에 생원 진사 시험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듯 훌륭한 인재를 발굴해 키운다는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본격적으로 요리 공부를 시작한 뒤였다.

“봄 미나리 살찐 맛을 임에게 드리고자/ 임이야 무엇이 없으랴마는 못다 드리어 안타까워하노라”처럼 봄 미나리에 이런 절절한 사랑의 마음이 풍겨져 나온 다는 것은 ‘청구영언’의 한 대목을 읽고 나서였다.

미나리는 논이나 개천 등의 습지에 저절로 나는 돌미나리와 주로 산속이나 건조한 곳에 자라는 불미나리, 물속에서 자라는 물미나리가 있다.

피를 맑게 해 주는 대표적인 식품으로 손꼽히는 미나리는 옛날부터 귀히 여겨 궁중에 진상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초목의 3 품을 꼽았는데 사시 사철 푸른 소나무가 나무 중의 일품이요, 눈 속에서도 피는 매화가 꽃 중의 일품이고, 야채의 일품은 응달의 수렁에서도 싱싱한 미나리를 꼽았다.

야채의 일품인 미나리의 기품에 근채 삼덕(根菜三德)이라는 세 가지 덕을 매겼다.

그 일 덕은 응달에서 오히려 잘 자란다는 점이요, 이 덕은 가뭄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살아내는 강인함이고 삼덕은 속세를 상징하는 진흙탕 속에서 때묻지 않고 싱싱하게 잘 자란다는 것이다.

조상들은 응달의 악조건에서도 살아내는 인생의 희망을 미나리에서 보았을 테고, 타 들어가는 가뭄의 고달픔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미나리에서 강인함을 배웠을 터이다.

온갖 더러운 물을 마다않고 다 받아들여 정화시키며 자신을 푸르름으로 더해내는 포용력에 삶의 지혜를 보았을 게다.

싱싱한 미나리 몇 줌 수북이 넣어 먹는 복어탕 앞에 두고 “미나리는 갈증을 풀어 주고 머리를 맑게 하며 술 마신 후의 주독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대장과 소장을 원활하게 해 주는 등 신진대사를 촉진시킨다. 그리고 여성의 월경 과다증이나 냉증에 좋다.” 라고 기술한 ‘동의보감’ 내용을 알지 못하면 어떠랴.

“미나리 생즙은 어린아이들의 고열을 내려 주고 머리가 항상 아프거나 부스럼이 나는 병을 치료한다.”라고 한 본초습유(本草拾遺)』내용까지야 모르면 어떠랴.

 미나리는 가을 무렵 모종을 심어서 겨울 동안 잘 관리한 후 다음 해 2~3월에 수확한다.

그러고 보니 왜 하필 어깨동무 씨동무들이 미나리 밭에 앉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겠다.

그 동무들은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이기에 겨우내 삭풍의 추위를 잘 견뎌낸 미나리와 보리가 동병상련의 씨동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른 봄 무렵이 미나리 제철이라지만 요즘 같은 겨울이라도 데쳐진 미나리와 숙주나물을 한 움큼 건져내어 우걱우걱 입안 가득 밀어 넣고 보면 향긋한 풀 내음과 복어탕의 진한 맛이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천하의 일미가 따로 없다.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이 좋은 미나리 전에 초고추장 듬뿍 발라 막걸리 한 잔과 함께 입안으로 쏘옥.

아! 사는 게 별건가.

미나리 한 줌이면 족한걸.

/서향숙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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