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어머니는 음력으로 1월 15일 이른 아침이면 우리들을 깨워 동네를 돌게 했다.

우리는 덜 깬 눈을 비비며 동네를 돌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이름이나 호칭을 부른 뒤 상대가 대답하면 잽싸게 “내 더위 니 더위 맞더위!”를 외쳤다.

정월 보름날 다른 사람에게 더위를 팔아야 그 해 더위를 타지 않는 다는 믿음 때문에 생긴 풍속이다.

그 더위 팔기는 해 뜨기 전에 만나는 사람에게 팔아야 효력이 있기에 새벽 동도 트기 전에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동네를 쏘다니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더위팔기는 주로 또래의 친구 사이에 이루어졌기에 더위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가끔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요즘은 전화나 메시지로 더위를 판다 하니 격세지감이 든다.

설날로부터 보름 뒤 인 정월 대보름날은 우리 세시 풍속에서는 설날 못지않게 중요한 날로 여겼다.

이 날에는 오곡밥에 무지개 나물을 먹으며 설날에 못다 빈 한 해의 소원을 다시 빌었다.

약밥과 오곡밥, 묵은 나물과 복쌈, 귀밝이술 등을 먹는 대보름날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불놀이다.

깡통에 구멍을 뚫어 휘휘 돌리며 노는 쥐불놀이는 아이들의 신나는 오락이고, 달집태우기는 동네 어른들이 죄다 모여 만든 대형 불꽃놀이다.

각 지방마다 볏가릿대 세우기· 복토 훔치기· 용알 뜨기· 다리 밟기· 나무 시집보내기· 백가반(百家飯)먹기· 나무 아홉 짐 하기· 곡식 안내기 등 다양한 행사 들이 있어 본격적인 봄 농사철을 앞두고 한해 풍년 농사와 복을 빌었다.

정월 대보름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독특한 음식이다.

찹쌀, 팥, 콩, 조, 수수 등을 섞어 지은 오곡밥은 대보름 음식의 대표다.

여기에 호박나물, 시래기나물, 고사리나물, 도라지나물, 취나물, 토란대나물같은 반찬을 곁들이면 별미중의 별미요 영양가 면에서도 상호 보완적으로 완벽에 가깝다.

단단한 견과류를 입에 넣고 깨먹는 부럼 깨기도 대보름날 음식의 독특한 조리법이다.

차가운 술을 남녀노소가 함께 마시는 귀밝이술과 솔잎을 깔고 떡을 쪄먹는 솔 떡을 만들어 나눠먹으면 정을 나누노라면 힘든 한 해 농사를 위한 협동의 의기투합은 저절로 이뤄진다.

저녁이 되면 모두의 눈은 하늘로 모아진다.

그냥 보름달을 쳐다보는 정도가 아니다.

보름달을 통해 한 해 농사를 점치는 진지한 의식 행사 같은 것이다.

즉, 달빛이 희면 그 해 많은 비가 내리고,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농촌에 저수 시설과 관개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요즘이야 재미있는 옛날 얘기 정도로 들리겠지만 하늘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옛날의 농사에서 달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 수준이었다.

요즘에는 정월대보름을 기억하고 지내는 사람이 드물다.

평소 넘쳐나는 영양소 섭취로 굳이 번거롭게 오곡밥이나 열 가지 나물을 만들거나 찾아 먹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여름 더위야 에어컨이 해결해 주는데 굳이 남에게 파는 수고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논가의 병충해야 신기술 농약을 뿌려버리면 간단한데 위험하고 번거롭게 쥐불놀이나 달집태우기를 할 필요도 없다.

문명의 발달 속에 우리의 고유 풍속인 정월대보름은 잊혀 간다.

하지만 정월 대보름의 음식이나 풍속은 그냥 일상이나 유희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듬뿍 담겨있다.

잘 곱씹어 보면 오곡밥이나 열 나물만큼이나 맛있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한 해 농사를 잘 대비하는 지혜가 넘쳐나는 풍속이 정월대보름이다.

비록 쥐불놀이나 달집태우기 등은 하지 못해도 오곡밥은 꼭 챙겨 먹어야겠다.

문명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뛰어 넘을 수 없는 넘사벽’이 우리 세시 풍속에 있다.

번거롭지만 챙겨보면 소중한 맛이 새록새록 우러나는 게 바로 정월대보름 음식이다.

별미가 별건가.

옛 지혜를 잘 살려 먹는 것이야말로 별미중의 별미다.

/방송인 / 음식컬럼니스트 / 서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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