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년 창건 6.25때 전소
영호대종사스님 탑비에
현대문학 거장들 전각돼
조선왕조실록 이안 장소

봄에 내장사를 찾는 사람도 있다고요? 묻는 사람은 늘 하나만 아는 사람입니다. 생각이 굳어 있는 중생이지요. 

내장산(內藏山)은 ‘안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 산’이라는 뜻이지요, 감춘다는 것은 다름 아닌 보여주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하니 무릇 중생들은 내장사에 들어가면 감춰진 그 무엇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저 가을 단풍만이 아니라 단풍으로 채색된 색(色)의 세계에서 감춰진 참의 세계, 즉 공(空)의 세계를 탐색하고 체현하고 또 구체적으로 발현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내장사를 찾는 의미를 나그네 스스로 규정하고 나자 마음이 좀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감춰진 그 무엇을 찾아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 아픔을 감추고 있는 내장사 

내장사 경내에 들어서 한참을 지나자 일주문 옆에 ‘내장산 국립공원 탐방 안내소’가 있습니다. 내장산과 내장사에 대한 자세한 안내가 마음에 닿았습니다. 내장사는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약 50여 동의 전각을 세우고 영은사(靈隱寺)로 창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유재란, 그리고 6.25 동란 때 전소되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었습니다.

일주문 앞이 한산합니다. 가을 단풍 행락객들이 단풍의 색깔보다 더 아름답게 차려 입서 여기서 사진을 많이들 찍는 곳이지요. 그리고 천왕문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적막했습니다. 사람이 드문 길이어서 단풍나무의 그림자가 문자 추상같은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 놓고 있었습니다. 단풍나무의 나신이 그린 그림은 허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물의 본질은 이렇게 그림자에서 시작되고 그림자로 끝난다는 말을 말없이 내뱉고 있는 듯 했습니다.

 

# 현대문학의 태동을 감추고 있는 내장사 

부도전 앞에 섰습니다. 호기심에 슬며시 들어갔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탑비(塔碑). 석전 영호 대종사 박한영 (石顚 暎湖 大宗師 朴漢永) 스님에 대한 비석이 마음을 확 끌었습니다. 재가 제자로 이광수, 신석정, 김동리, 서정주, 조지훈, 김달진, 오장환 등의 이름이 비문의 마지막에 전각되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현대문학의 태동이 다름 아닌 이 선사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아닌가요. 순창 구암사(龜巖寺)에서  문필봉의 기운을 받고자 옛날부터 문인들이 많이 찾아와 공부했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이는 선운사와 내장사에 주석하셨던 석전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내장사는 문학을 감추고 있습니다. 백제가요 ‘정읍사’가 그냥 머물러만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을 흘러 우리의 현대문학의 심장을 새롭게 움직이게 한 사찰이었습니다.

천왕문 앞에는 연못이 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단아한 소녀와 같은 맑은 얼굴의 연못이 눈빛을 반짝이며 나그네를 반깁니다. 다사로운 마음으로 순화된 나그네도 평화로운 눈길이 되어 삼층탑을 봅니다. 원래 대웅전 앞에 있던 탑인데 대웅전이 불타고 나서 이 자리로 옮긴 듯합니다. 정혜루(定慧樓) 밑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새 건물 대웅보전의 위용이 나그네를 압도합니다. 그리고 목탁소리와 함께 스님의 낭랑한 독송 소리가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내장산 봉우리마다 피어나고 있는 듯 느낌이었습니다. 대웅전 앞에 서고 보니 이 터야말로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래봉, 불출봉, 망해봉, 연지봉, 까치봉, 신선봉, 연자봉, 장군봉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아늑한 곳에 주요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잦은 전란과 화마로 인한 상처 속에서도 늘 이렇게 새롭게 서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피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반가운 팻말이 서 있습니다.

아직은 찬 봄바람을 탓하며 들어가 앉았습니다. 반갑게 맞아주시며 보살님이 차를 내놓습니다. 황차 같은데 향기가 그윽합니다. 내장사 신도나 탐방객에게 차를 무료로 대접한다고 합니다. 차상(茶床)에 앉아 탐방객들이 조용히 그러나 참선하듯 차를 마십니다.
조주선사(趙州禪師)의 끽다거(喫茶去)를 그려 봅니다. 불법을 물어 답한 수좌에게 이르고 이르지 못함에 관계치 않고 ‘차나 한 잔 마셔라.’는 선사의 일갈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나그네도 ‘끽다거’하고 나옵니다. 조주의 선풍이 내장사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는 무언의 말씀이 귓전을 스쳐가고 있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을 감추고 있는 내장사 

조선왕조실록을 이안(利安)했던 곳이 내장사라고요? 그렇습니다. 이 실록은 처음에는 2벌씩 작성되어 서울의 춘추관과 충주사고(忠州史庫)에 소장하였는데, 멸실의 염려 때문에 1439년(세종 21)에 사헌부의 건의를 받아 2벌씩을 더 등사하여, 전주와 성주에 사고(史庫)를 신설하여 봉안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조선초기의 사대사고(四代史庫)입니다. 
병화로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 또한 왜적이 전주로 접근함에 따라 소실될 위기에 처하자, 전주 경기전(慶基殿) 참봉 오희길은 손흥록, 안의 등과 함께 전주사고에 있던 태조 어진을 용굴암으로, 실록은 은봉암으로 이안시켰다고 합니다. 
글쎄요, 만일 전주사고본까지 불타 버렸다면 우리의 역사 기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자랑스러운 길, ‘실록의 길’을 봄시내를 따라 걸어갑니다. 그리고 까마득한 계단을 따라 용굴암에 이릅니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체험을 했습니다. 역사를 아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고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존재 가치는 역사 속에 투영된 자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 없는 ‘나’라는 존재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산로 1253 내장사 
-지번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590  
-전화번호 063-538-8741 

/전북도 블로그기자단 '전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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