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치즈를 만들어 개를 줬더니 개도 안먹읍디다.”

임실에 정착해 처음 산양유로 치즈를 만들던 당시를 회고하며 맛깔스럽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던 생전 지정환(디디에 세스테반스) 신부의 육성 강연이 엊그제 같은 데 13일 오전 숙환으로 선종했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졌다.

얼마나 치즈의 향내가 좋지 않았으면 개도 주니 먹지 않았을까? 개도 먹지 않았던 치즈.

이는 최초 임실 치즈 개척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그가 향년 88세의 나이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추억들만 남겨주고 먼 하늘로 떠났다.

지정환 신부는 풀밭이 많은 임실에서 키우기 쉬운 산양을 길러 그 산양유를 생산했으나 당시 한국에서 낯설었던 산양유가 잘 팔리지 않고 남은 것이 버려지게 되자, 그 젖으로 치즈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곧 이를 더 크게 벌여 군민들의 삶을 돕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벨기에의 부모님으로부터 2000달러를 받아 허름한 치즈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치즈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3년이 지나도 성과가 나오지 않자, 프랑스와 이탈리아 견학까지 가서 기술을 배워와 69년에 비로소 치즈 생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벨기에 브뤼셀 한 귀족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던 고인은 당시 한국전쟁의 여파로 아프리카보다도 가난하다는 한국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후 1960년부터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활동하며, 국내 치즈 산업 육성을 위해 노력해왔다.

고인은 1964년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후 임실에서 산양 보급, 산양유와 치즈 개발에 힘썼다.

특히 임실 성가리에 국내 첫 공장을 설립해 치즈 산업을 이끌었고 임실 치즈 농협도 출범시킨 장본인이다.

그래서 그는 줄 곧 ‘임실치즈 아버지’, ‘임실 치즈 개척자’, ‘한국 치즈의 대부’로 불린다.

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지역의 복지시설을 오가며 장애인과 소외받는 이들을 돌보며 사랑을 몸소 실천한 데 있다.

또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 시설에는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저항운동을 펼치다 추방 명령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고, 4·18 민주화운동 때는 시민군에게 제공할 우유를 차에 싣고 홀로 광주에 갔다 참상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지난 2004년 은퇴 후 장학재단을 운영해온  그는 너무 열심히 살아온 탓일까? 이제는 편히 쉬라 하늘이 고인에게 휴식을 취하라 명한 듯하다.

우리에게 모든 걸 주고 떠난 고인이 부디 평안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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