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의 진화, 이젠 그 진화의 속도를 측량하기조차도 어려운 시기에 살아가고 있다.

또한 미래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진화될 것인지 조차도 짐작하기도 어려운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근대의 50년의 시간이 그 이전의 2000년의 시간 변화보다도 훨씬 크고 급격한 변화를 이루어온 것 같다.

문제는 그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적응력도 가지지 못한 채 변화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더 빠르고 신속하게 그리고 더 편리하고 편안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끝없는 욕망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날로그가 가진 감성의 따뜻함이 디지털의 냉혹하고 차가움으로 진화하여 손으로 움직이는 시대에서 음성으로 움직이고 이제 나아가 마음으로 움직이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문명의 진화가 인간의 감성에 미치는 영향이 무언가조차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변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과연 이렇게 빠르게 진화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감성적 따뜻함이 없어지면서 인간의 욕구를 빠르게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돌발적 행동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가진다.

필자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사회공동체가 가진 따뜻함이 담겨져 있었다.

전혀 그렇다는 것은 아닌데 사람으로 인해 위해의 요소를 크게 걱정하지 않고 살았던 시대였다.

이웃과 크게 담을 쌓거나 견고한 철문을 만들고 복잡한 시건장치를 할 필요 없이 그냥 쪽대문에 항상 누구든지 들랑거릴 수 있거나 아니면 그런 대문조차 만들지 않은 채 살아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세계적으로 경제 최하위의 나라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들이 어렵고 힘겨운 살림살이여서 가져갈 것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그날 먹을 양식은 없어도 도둑맞을 물건은 있다는 말처럼 아무나 쉽게 들어와 가져갈 수 있는 환경인데도 적당히 만든 헐렁한 출입문에도 걱정 없이 외출하던 시대였다.

그 시절의 힘겨움을 어떻게 다 표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웃 공동체는 따뜻함을 가진 시대였다.

1960년 국민1인당 GNP가 고작 60불에 불과했던 나라가 이제 30000만불 시대가 되었으니까 500배가 성장하였다.

그만큼 살림살이가 넉넉해지고 여유롭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행복지수도 높아지고 공동체 관계도 발전하여 따뜻하고 편안한 사회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공동체 안에 인간적인 따뜻함은 사라져가고 이웃 간의 담은 견고해지고 의심과 견제를 통해 서로 불신하고 작은 불편에도 분노와 함께 호전적인 태도를 가진다.

정직하고 믿고 사는 것이 순진한 것인지 바보스러운 것인지 조차도 구별하기가 어렵다.

정직하고 순진한 사람은 악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어 이익을 취득하는 대상이 된다.

문명의 진화를 이용한 보이스피싱이나 스펨이 진화된 문명에 적응하지 못한 취약한 자들에게는 고통을 만드는 도구이다.

풍요와 문명의 발달이 공동체의 행복과 비례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어서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바다를 만든다.

그러한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에 다양한 문제를 만들어간다.

인내심과 포용력을 상실한 사회에는 분노와 충동적인 행동이 크고 작은 많은 사건을 만들어간다.

최근 작가 김훈은 ‘백두대간캠프’에서 공격적 세태 비판을 했다.

“우리가 전통이 가르쳐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나 인간에 대한 연민, 남의 고통에 동감하는 감수성을 상실하고, 천박하고 단명한 잔재주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작가는 “우리 사회 특징은 악다구니, 쌍소리, 욕지거리”라며 “이걸로 날이 지고 샌다. 몇 년째 난리 치고 있다. 욕지거리 거짓말로. 하루도 안 빼고 매일 욕을 한다”고 지적했다.

「작가 김훈이 본 우리 사회의 현 세태에서 발췌」 가장 따뜻하고 편안해야 할 가족 공동체 안에서 끔찍하고 처참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아동 학대에 의한 사망자가 늘어나고 그 가해자의 80%가 부모라는 것이다.

지난주에는 아버지를 때려 숨지게 한 뒤 5개월간 시신을 방치한 20대 아들이 구속이 되었다.

제주에서는 전 남편을 펜션에서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려 했으나 자신의 긴 머리로 얼굴을 가렸다.

피의자는 얼굴 공개를 피하는 이유가 “아들과 가족 때문”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얼굴이 노출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과연 아들과 가족 때문이라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이미 사회면을 장식한 사건으로 인해 주변에 알려졌을 것이고 가족들은 두문불출하고 있을 텐데 범죄보다 수치심이 더 크게 여겨진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에 라디오프로그램에서 지체 부자유자가 자신과 같은 사람도 인내하면서 잘못된 길을 걸어가지 않는데 건강한 사람들이 왜 잘못된 길을 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세상의 많은 범죄는 신체가 건강한 사람들의 몫인가 보다.

세상에는 건강한 사람이 가진 평범한 것들이 소원으로 되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세상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고 듣지 못하는 자들은 세상의 소리를 한번 듣는 것이 소원이고 걷지 못하는 자들은 활기차게 한번 걸어보는 것이 소원일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포로가 되어 분노에 사로잡혀 충동적 행동을 통해 후회하는 삶을 살기보다 타인이 간절히 소원하는 것을 가진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전주남부교회 강태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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