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년 어느 날 포르투갈 상인 100여 명을 태운 배가 일본의 사쓰마번 다네가섬 (種子島, 종자도)에 표류 끝에 도착했다.

표류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은 정말로 기이한 물건 하나를 일본에 가져오게 되는데 바로 조총이다.

이렇게 해서 극동아시아 지역에 들어오게 된 이 조총은 종자도총 (種子島銃 : Tanegashima Arcabuz)이라고 불리우게 된다.

이 총은 인도의 고아에서 만들어진 단발식 화승총의 원형이다.

이 섬의 영주인 다네가시마 토키타카 (種子島 時堯)는 총을 보고 너무 맘에 들어서 엄청난 은을 주고 두 정의 총을 샀다.

현재 가격 20억 원씩을 주고 샀다고 전해지는데 엄청난 가격을 주고 산 사람이나 판 사람들 모두 대단하다.

한 자루는 그 지역의 쇼군에게 선물하고 또 한 자루는 대장장이 야이타에게 복제할 것을 주문했다.

대장장이의 부단한 노력 끝에 총의 모든 부품을 만들었으나 총신에 나선형의 구멍을 뚫어 나사를 고정시키는 기술이 없어서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이를 해결하고자 포르투갈 선원인 제이 모토라에게 이야기하자 영주 딸을 주면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성주는 자기 딸인 와카를 결혼시켜서 그 이듬해에 포르투갈을 다녀와 이 기술을 해결했다.

일본사람들의 기술 해결에 대한 집념을 볼 수 있는 대목으로 소설 같은 이야기다.

이렇게 복제해 10년 내에 3,000정 이상의 종자도총이 생산됐고 이후에 이 종자도총의 결함을 계속적으로 보완해 살상력을 높이고 정확도, 그리고 야간에도 사격하게 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대량생산된 총이, 임진왜란 시에는 왜군 조선반도 침략군의 1/4인 16만 명에게 지급됐다고 한다.

즉, 조총수이었다 하니 이미 15세기 이후에 일본은 총기류의 대량 생산국에 됐던 것이다.

이미 독자들도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시에 총은 한 정도 없었다.

그러나 1555년 일본에 조총이 도착한 12년 후인 명종 10년에 조선왕에게 직접 보고됐으나 관심 없었다.

더구나 1589년 선조 22년 황윤길이 일본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쓰시마도주 평의지(平義智)가 선물 몇 자루 받아왔으나 이 또한 무시당한다.

이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하고 조그마한 사건 같이 보이나 신기술을 받아들이나? 안 받아들이냐? 에 따라서 역사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조총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고 조총과 왜의 기술력을 무시했던 선조는 제일 먼저 버선발로 도망간다.

조선군은 창·칼·죽창의 재래식 무기로 대항해 7년 동안 인구 500만이었던 조선 백성들이 거의 50~100만 명 이상이 줄고, 전국은 쑥대밭이 됐다.

기록에 나와 있는 것만 1598년 1월 현재, 조선 사람의 코 18만 5,738개, 명나라 사람의 코 2만9014개, 합계21만 4,752개의 코가 소금에 절여져 왜로 갔다.

포로는 최소 20만 명, 최대 50만 명으로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더구나 숱한 조선인 특히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붙잡혀가 현재의 일본 제조업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이 총을 우리나라에서는 조총(鳥銃)으로 불리었다.

우리는 그냥 표현을 “날아가는 새도 잡는 총” 정도로 얌전하게 불리었으나 일본에서는 철포(鐵砲, 뎃포) 즉 바위위에 올려놓은 술잔을 깨칠 정도로 강한 것으로 일본과 조선 양국은 불리운 것조차도 차이가 난다.

우리가 가끔가다가 쓰는 말인 “무데뽀”(無鐵砲 : 무철포)는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것”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총도 없이 전쟁터 또는 싸우러 나간다는 뜻에서 나왔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외부 문물을 받아들이는 판단능력이 부족하여 임진왜란을 무데뽀로 죽창으로 싸웠던 것이다.

그리고는 정확히 300년 후에 죽창을 들은 조선 농민들에 의해 동학 혁명이 일어나 조선 정부군과 일본군에 의해서 전주와 공주 지방의 동학혁명 참가 조선인들을 소탕하는데 20~40만 명을 학살했다.

말 그대로 자기나라 정부군이 외국의 힘을 빌려 청소를 한 것이다.

이때 사용한 총이 바로 기관총이다.

일본군에 참살된 조선인들의 피가 금강을 빨갛게 물들여 흐르는 등, 참상을 이루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고 죽창만을 들고 기관총을 대항해, 대책 없이 그냥 죽창만을 들고 무데뽀로 전쟁에 임했던 것이다.

동학란이 끝난 120년 만이 지난 현재에 똑같은 형국이 되풀이 되고 있다.

또 죽창만을 들고 무데뽀로 전쟁에 참가하란 말인가? 이제는 상대방은, 전 세계의 경제전쟁터의 상대국의 무기는 조총과 기관총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단순한 치고받고 육박전하는 전쟁터가 아니라, 전 산업 분야가 거미줄처럼 연결된 전 국민들의 생활 터전이 달린 무역전쟁터이다.

또 위정자들은 우리의 상태를 눈에 가린 채, 외부는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는 채, 국민들을 감성을 선동하고 죽창의 날만을 더 날카롭게 세워서 전진하라고 한다면 이는 또 다시 흑 역사의 반복일 뿐이며 그 폐해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매사가 유비무환이며 좀 더 생각을 한 후에 일을 벌여야 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위정자들의 준비 부족으로 인한 죽창을 들고 무데뽀로 전쟁터에 나가는 바보 같은 역사는 되풀이 하면 안 된다.

/강길선 교수, 전북대학교 고분자나노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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