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마을~논개생가까지
비단 단풍길 걸음 '사뿐'
지실가지 산중턱 넓은 땅
도깨비마을 도깨비 동굴
논개생가 주변 볼거리도

| 장날을 뒤로 하고  
아침 일찍 찾은 장수 읍내가 북적입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코끝은 쌔 한데 다들 바쁩니다. 찐빵집 솥에선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김이 나고, 뻥튀기 채비를 한 트럭이 휙 하고 지나갑니다. 할머니들 머리엔 아이들 목욕해도 될 만큼 큰 함지박이 올라타 있습니다. 수건으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올라타 있습니다. 25년 전에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이들은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어느새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똑같은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순간 25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길도 바뀌고, 농협도 바뀌고, 내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는데 눈앞에 옛날 모습이 펼쳐져 있으니 기분이 묘합니다. 이 풍경을 더 보고 있고 싶은데, 야속하게도 군내버스가 출발합니다. 장안산 연주마을로 갑니다. 장수 오일장인 오늘. 시간을 넘고, 세월을 보내고, 새 추억을 만들기 위해 장안산 마실길을 걷기로 한날입니다. 하늘이 눈부시게 파아란 늦가을. 연주마을에서 논개생가 까지 걷기로 한날입니다.                    

              

| 단풍잎으로 도배한 길. 연주마을 ~ 지실가지 가는길
단풍이 막바지인 연주마을 입구에 버스가 멈췄습니다. 내리는 사람은 두 명뿐. 그나마 버스도 하루에 두 번밖에 서지 않는답니다. 장안산 마실길은 연주마을에서 시작됩니다. 마을 옆을 흐르는 계곡의 모양이 구슬을 이어서 꿰어놓은 형국(연주, 聯珠)이라 그렇게 이름이 지어진 것인지,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내어(연주, 演奏) 지어진 이름인지 모르겠지만 둘 다 그럴 것 같고, 마음에도 듭니다. 마을 입구에서 등산화 끈을 고쳐 매고 허리춤을 치켜 올려 봅니다. 전북천리길 안내판을 지나 무드리교 앞에 오니 왜 연주 마을인지 알 것 같습니다. 길이 너무 예쁘네요. 간밤에 장안산 선녀들이 내려와 단풍으로 카페트를 만들어 깔아 놓은 것 같습니다. 단풍으로 유명한 다른 곳은 수많은 인파에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이 다 찢겨 있지만, 이곳은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정말 밟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깨긋한 비단 단풍길입니다. 
길이 정말 예쁘네요. 경사도 거의 없고, 험하지도 않습니다. 아스팔트나 시멘트 포장이 아닌 단풍잎이 덮여있어 폭신한 길입니다. 모퉁이를 돌면 길 색깔이 달라지고, 물길을 건너면 숲 색깔이 달라집니다. 길에는 새 소리와 내 발소리뿐 조용합니다. 길에게 말동무 라도 해달라고 할 판입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예쁜 길에 넋이 나가 있을 무렵 뉘집 배추밭이 나옵니다. 지실가지에 닿은 것 같습니다.
지실가지. 땅이 밝습니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 이렇게 양지바르고 넓은 땅이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혼자 들어와 살아도 우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을 이름은 토양이 비옥하여 모든 열매가 풍성하다는 뜻이랍니다. 2010년에야 전기가 들어 왔다고 하네요. 마을 입구에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나무가 있습니다. 작지만 예쁘고 신기한 나무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소리가 들립니다. 곰순이 소리입니다. 이름은 살갑지만 몸집은 제법 큽니다. 지나가다 허툰짓 하면 금방 달려들 것 같이 늠름한 모습입니다.
“장안산 가시오?” 
“네” 
마루에서 손주와 놀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물으십니다. 예의상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참 멋진 분이십니다. 전북 천리길 걸으러 왔다고 말씀드리니 앞으로 가는 길을 잘 알려 주십니다. 
이곳에서 산나물과 산야초, 그리고 산에서 난 재료로 만든 차를 파는 줄 알았으면 현금을 좀 챙겨 올 걸 그랬습니다. 다음에 또 오라는 운명이겠죠. 
할아버지가 알려주신 대로 길을 걸어 봅니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왔지만 잘못 들지 않고 쉽게 길을 잡습니다.
 

| 예쁜 숲길의 교과서. 지실가지 ~ 백두대간 능선
마을 길이 끝나니 숲길이 이어집니다. 뉘 집 밭을 지나 바로 숲길이 나옵니다. 길이 더 예뻐 집니다. 이 동네 예쁜 길 천국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멋있고, 올레길 보다 운치 있습니다. 산길이지만 좁지 않아 쓸쓸하지 않습니다. 걸을수록 단풍이 더 멋있어 지고, 하늘은 더 파래 집니다. 오름길이 시작되지만 힘들지는 않습니다. 목이 마를 무렵 샘이 나오고, 깊은 숲길이 이어지다가 하늘과 맞닿을 무렵 예쁜 나무계단길이 나오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드디어 능선 마루에 다다릅니다. 백두대간 능선에 이렇게 쉽게 닿을 수 있는 길이 또 있을까요. 감개가 무량합니다. 빽빽한 숲 사이로 하늘이 있고 건너편 산이 너무 멋있게 보입니다. 뻥 뜷린 장쾌한 맛은 없지만 사이사이로 보이니 더욱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좀 쉬다가 능선 마루를 기준으로 이쪽으로 갔다가 반대쪽으로 갔다가 해 봅니다. 오분 동안 백두대간을 열 번도 더 넘어 봅니다. 재미 있습니다. 그리고 내려가기 싫을 정도로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이런 멋진 곳을 오는동안 단풍 행락객 한사람도 만나지 않고 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백두대간 단풍을 전세 낸 기분입니다.

 

| 아름답고 폭신한 하산길. 백두대간 능선 ~ 임도 갈림길 
땀이 말라 약간 추워질 무렵 길을 다시 떠나 봅니다. 아까 샘에서 길었던 물을 시원하게 한모금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나 봅니다. 아쉬움을 달래느라 반대편으로 한번 더 넘어 갔다가 길을 시작합니다. 원장안 마을로 가는 길은 좀 가파른 나무계단길입니다. 절벽같은 길이지만 계단과 난간이 안전하게 설치되어 있고, 나무가 빽빽해 겁이 나지는 않습니다.
십분 정도 나무계단을 내려오니 이번엔 예쁜 오솔길이 나옵니다. 인적이 드물어 낙엽이 폭신한 길입니다.
스펀지 케익 위를 걷는 것 같습니다. 길은 가팔라 보이지만 무릎은 아프지 않습니다, 걸을 때 마다 케익이 먹고 싶어지는 길입니다. 빨리 내려가 먹으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뭉크’의 작품 ‘절규’ 모양을 한 나무를 지나 폭신한 길을 걷는데 이번엔 코끝에 구수한 향기가 들어 옵니다. 낙엽이 쌓여 숙성된 깊은 길의 향기입니다. 깊은 낙엽 속에서 푹 익어 곰삭은 길의 향기네요.  
‘향기로운 길 냄새’ 그 구수한 향기를 따라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가파른 길을 사라지고 정겨운 쉼터와 함께 임도가 나타납니다. 

 

| 도깨비가 사는 마을. 임도 갈림길 ~ 원장안 노인회관
햇살이 따뜻한 산길입니다. 산의 북쪽인데 이렇게 따뜻한 볕이 들다니. 그야말로 풍요로운 가을 산길입니다. 마을 반대편 길도 멋진데 어디로 가는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많이 다닌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다른 마을로 이어진 길 같습니다. 아쉽지만 이제 산길을 뒤로 하고 마을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듭니다. 배춧값이 금값이라는데 이 마을엔 통통하고 먹음직스런 배추밭이 지천입니다. 끝물 코스모스도 아쉽지만 예쁘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마을이 이어집니다. 오래되어 보이지만 예쁜 집과 밭을 지나니 아스팔트 포장된 길이 나옵니다. 차가 다니지 않는 조용한 마을길입니다. 저 혼자 두고 마을 사람들 모두 어디 간 것 같습니다. 조용하고 풍요롭고 따듯하고 정겨운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 옆에 도깨비 굴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도깨비가 산다고 하는군요. 가끔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씨름 한판 하자고 한다는데 재밌기도 하고 살작 겁이나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다행입니다. 도깨비를 만나기 전에 마을 쉼터인 노인회관에 다다랐습니다.
볕이 잘 들고 감나무가 먹음직스런 마을 한가운데 작고 예쁘게 자리해 있습니다. 나무도 예쁘고 길도 예쁘고 그 옆에 흐르는 개울도 예쁩니다. 감나무를 피해 쌓은 담벼락이 재미있어 사진에 담고 마음에 담습니다. 그리고 먹음직스런 감도 사진에 담아 봅니다. 머릿속 깊이 담아 봅니다. 이 마을. 어느 집에 길을 물으러 들러도 맛있게 익은 홍시랑 따끈한 찐고구마를 내어줄 것 같은 마을입니다. 
 

| 논개님 보러 가는길. 원장안 노인회관 ~ 논개생가
마을 입구 안내판을 보니 장안산 마실길은 원장안 마을에서 끝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곳에 온 김에 계획대로 논개 생가까지 가보려 길을 찾았습니다. 
“논개 생가 가시오?”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지나가던 차에서 창문을 내리고 어르신이 물어봅니다.
‘혹시 도깨.......비?’
일단 씨름을 제안하지 않았고, 논개 생가까지 태워주신다는 말에 혹하여 차에 올라 봅니다. 
가는 길은 예쁘고 차안은 따뜻하여 졸음이 몰려 왔지만 꾹참고 정신을 바짝 차려 봅니다. 
논개생가 근처에 고장난 트랙터 고치러 가신다하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터널을 지나 논개 생가 가는 길. 차도 없고, 단풍은 너무 멋지고, 길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논개 생가 앞 넓은 주차장 입구에서 내렸습니다. 담에 또 오겠다고 하고 내렸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논개 생가 앞에 섰습니다. 의랑루 앞에 섰습니다. 갑자기 뭉클하여 눈물이 납니다. 

‘그분의 생가라니’ 
입구 안내판을 읽고 숙연한 마음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갑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동상에서 그녀의 모습. 열 손가락에 낀 가락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결의에 찬 그 눈빛. 아이들이 있다면 꼭 함께 와서 보여주고 싶은 곳입니다. 그리고, 생가 바로 앞 기념관에서 그분의 새 영정을 보았습니다.
그동안 친일작가의 작품이 국가 표준영정이었는데, 얼마 전 보다 과학적인 고증과 연구를 거쳐 새롭게 바꾸었답니다. 수십년 전에 논개 사당에서 옛날 영정을 보았었는데, 새 영정이 훨씬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더 숙연해집니다. 정말 그분인 것 같습니다. 또 눈물이 나네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에게 당연히 이 정도 대우는 해 줘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낸 세금으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이 뿌듯했습니다.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생가라 불리는 초가는 원래 아랫마을 대곡호가 생기면서 수몰되어 지금 자리로 옮긴 터라 감흥은 좀 덜했지만, 새로 바뀐 국가 표준영정과 동상 그리고 의랑루를 비롯한 주변 경치가 마음을 숙연하게 정리하는데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길. 비단길 같은 단풍길, 멋진 숲길, 그리고 그 길에서 나는 가을의 향기가 또 한번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게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땅에서 태어나 자라 나라를 위해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논개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던 길이었습니다. 이제 낙엽이 다 떨어지면 이곳은 흰소복같은 눈으로 덮이고, 내년 봄이면 다시 다양한 색깔의 길로 바뀌겠지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고 다시 돌아오는 우주의 섭리가 몸소 느껴지는 여행이었습니다. 장수 마실길에서 실컷 느끼고 갑니다. 길이 예쁜 길, 그 향이 좋은 길, 그 길과 하루를 재밌게 마실하고 왔습니다.

 

| TIP.  가을 장안산 마실길 걷기를 위해 알아 두어야 할 사항들 

1. 연주마을에서 시작해서 원장안 마을에서 끝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고 힘이 덜 듭니다. 

2. 연주마을과 원장안 마을 모두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으니 시간을 미리 체크하세요. 

3. 반드시 목이 긴 등산화와 워킹 스틱, 그리고 배낭에 간식과 식수를 반드시 챙겨 가세요. 

4. 주말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니 혼자 가지 마시고 동반자와 함께 가세요.  

5. 지실마을 지나 숲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백두대간 능선마루 구간은 휴대폰이 터지지 않습니다.     

6. 연주마을 입구에 마지막 화장실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화장실이 없으니 주의하세요.

7. 원장안 마을에서 논개생가 까지는 차도 갓길을 걸어야 합니다. 차조심 해야 합니다. 

8. 중간에 절대 쓰레기를 버리면 안됩니다. 모든 쓰레기는 배낭 안에 담아 오세요. 

9. 비가 온 다음 날, 습기가 많은 아침에는 나무 계단과 길이 매우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10. 마을을 지나면서 감이나 대추 같은 열매를 함부로 채취해서는 안됩니다. 

주인을 찾아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구입 하세요.

/전북도 블로그기자단 '전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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