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야기자원공연화 시범공연
사업방향성 부족··· 감칠맛나는
사투리-연기-소리 작품조화이뤄

지역 소재를 발굴하여 무대화하는 과정까지의 긴 여정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김선달과 반대산 귀신 이야기 ‘귀신들’이 극단 까치동에 의해 우진문화공간 예술극장에서 공연으로 올려진 것이다.

3차에 걸친 선정과정을 통과해 공연에 이른 작품이기에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법 오랜 성장 햇수를 거느린 극단의 이력과 매해 해외공연의 성공적 사례를 기록하며 지역극단의 앞머리에 섰던 극단의 또 다른 도전이라 내심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공연은 초반 30분 정도까지 몸짓과 소리, 의외의 등장 등으로 적절한 융합의 형태와 텐션으로 다음 장면부터는 더한 연극적 장치가 부가되리라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정도에 이르렀으나 이후 단순한 스토리 라인에 기인한 느슨한 전개로 초반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한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창작 초연작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새로운 시도와 시선, 이전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적용 -그것만으로도 미덕이 될 수 있다.

또한 단순한 스토리 라인이 때론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공연은 비록 쇼 케이스 성격임을 감안해도 단순하고 특별한 반전 없이 이루어지는 단선구조를 대체재를 통해 보완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색다른 장치를 마련하는 데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출연자들은 다양한 장르에서 우수한 인자들을 모아 연기력의 부조화나 편차가 없었고 각 장면 구성에 이바지를 하고 있다는 점은 별개의 문제다.

공연의 초목적이 ’한판 신명 나게 놀아보자‘가 아니라 ’숨겨져 있던 전주 이야기를 극작과 공연을 통해 발굴하자’였다면 이 공연이 사업 방향성에 부합했는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하겠다.

물론 현대인들은 진지한 내용과 형식의 공연을 보며 자기반성과 성찰을 꾀하기보다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오락적 요소가 많이 적용된 공연을 선호하는 것이 현실이다.

타 장르에 비해 엄격한 관극 태도의 요구,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서만 가능한 접근성의 문제, 시공의 제한 등을 이유로 점차 연극을 멀리하려는 가운데 혼용과 융합을 기초로 하여 오락성과 대중성을 가미해 이를 돌파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위의 견해로 이 공연이 가진 미덕이 폄하될 수 없는 것은 몇 가지 뚜렷한 장점과 특징이 감지되고 있고 발전 가능한 요소들이 극 곳곳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구수함과 정겨움이 가득한 사투리를 감칠맛 나게 구현한 점이다.

지역의 인물과 숨은 이야기를 부상시키는 작업은 지역의 정서와 말투 등 기본과 기초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데 이 점을 제대로 구현해낸 것이다.

진지함 속에서도 해학과 능청스러운 연기를 통해 줄곧 웃음과 즐거움을 유발했던 점 또한 칭찬할 대목이다.

또한 단순 안무나 움직임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무대 몸짓 전문가를 초빙해 주요 장면에 적용했다는 점 또한 이 공연의 변별력 확보에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각양의 전문가들이 작품 완성도에 기여를 했는데 소리, 타악 등의 화학적 조합은 물론이고, 그들이 가진 연기역량은 전문 연기자의 그것을 무색하게 하는 수준이어서 작품이 조화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겠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반대산 혹은 반태산은 조선시대 여단터가 있었던 자리로 이곳 반대산(盤擡山)은 반다뫼, 반대묘 등으로 불리던 곳으로 지금은 민가로 가득차 산이라 느끼지 못하지만 조선시대에 이곳 여단터는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기린봉 밑의 성황사에서 제신을 모셔와 안치하고, 좌우에 여귀를 배열하여 전염병이 들어오면 수시로 제사를 지내 전주의 안녕을 빌었던 곳이라 한다.

작품에서 언급된 귀신이 많은 지역이라는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다 하겠다.

죽은 영혼들이 모이기 좋은 지세여서 그런지 묘지가 많은 곳이기도 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3백여 년 전 전주 부성 서문 밖에 김선달이라는 사내가 살았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는 데다 살림마저 궁핍하여 곤궁하기 이를 데 없는 처지였다 한다.

그러나 주역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이 있어 허구한 날 귀신을 부르는 주문을 익히더니 어느 날 인봉리 골짜기로 들어가 벼락 맞은 나무를 꺾어 방망이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김선달은 이 방망이를 들고는 반대산에 들어가 모여든 귀신들에게 즉시 월낙지로 물러가라고 일갈했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귀신들은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얼결에 혼자 남은 총각 귀신에게는 자신의 집에서 한 해 동안 머슴을 살라하며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씩 해오고 남문과 서문 밖 장터에 있는 가게마다 엽전 한 잎씩을 받아오라고 명령한다.

이후 김선달의 살림은 나날이 펴지고 근심 걱정 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총각 귀신에게 약속했던 기한은 점차 늘어나고 그에 상심한 총각 귀신의 한숨이 깊어질 무렵, 김선달이 남문 밖 거리를 걷고 있는데 한 노인이 하룻밤 신세를 져야겠다고 사정을 하고 마지못해 응했는데, 깊은 밤 큰 소리에 잠이 깬 김선달이 밖을 살펴보니 상여 한 대가 문 앞에 놓여 있고 교군들이 타기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가더니 어느 곳에 이르자 비로소 교군들은 그를 내려놓았는데 귀신 무리들이 다가와 그를 에워쌌고, 이윽고 노인이 나서더니 꾸짖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가난하게 살다가 죽어서 총각 귀신이 된 것도 서러운데 어찌 그를 잡아다가 종으로 부리느냐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다만 이제라도 총각 귀신을 놓아주면 김선달의 처지가 가련하여 아들을 점지해 주고 죽은 누이와 총각 귀신도 맺어주고 생활도 돌봐주겠다고 하였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간신히 귀신들의 노여움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바로 묘지 골짝이었다.

그 후 김선달의 아내는 태기가 있어 아들을 얻었으며 생활도 넉넉하게 폈으니 귀신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지금 이 도심에는 개발의 광풍과 세월 속에 묻혀진 이야기들이 즐비할 것이다.

전주문화재단의 이 당연하고도 야심찬 프로젝트가 나날이 성장하고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져 우리의 자산으로 축적되는 창구 역할을 계속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도 시종 흡인력을 유지하며 보다 정교하고 튼실한 모습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지속적인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길 바라본다.

/전북연극협회 회장 조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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