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0년간 쥐띠 해 있었던 일들을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편집해 보았다.

1900년(광무 4) 오목대에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遺址)’비와 비각이 세워진다. 비의 뒷면에 새긴 글이 마치 100년 앞을 본 것 같다. 글 가운데 자만동의 “장군수(將軍樹)와 호운석(虎隕石)이 말을 하는 까닭에 전주가 국가의 종향(宗鄕)이 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나무와 돌이 말을 했다는 120년 전의 서사기법이 어떤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지금 전주한옥마을을 걷다 보면 가로등에 설치된 스피커와 곳곳의 다양한 전산 장치가 이곳을 해설을 하고 있으니, 마치 미래를 내다 본 것 같다. 같은 해 일본인이 설립한 삼남학당과 전주신흥학교가 미국 예수교 남장로파 조선 선교회 파견 선교사 이눌서의 사택에서 신학문학당(新學問學堂)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한다. 

1912년 1월 전주학교조합이 설립된다. 대표와 12명의 조합 의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같은 해 기능을 상실한 전라감영의 부속 건물인 객사(현 풍패지관)로 전라북도 산업장려관이 이전된다. 도내의 특산품과 일본 지방의 주요 산물이 진열되고 판매된다. 

1924년 4월 전주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들이 학교 교무 개정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돌입한다. 조선어 교육, 학교 경영에 무책임한 교장과 불친절한 교원, 기숙사에 대한 불만이 주요 진정 내용이다. 같은 해 전북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전주에 상수도가 준공된다. 

1936년 전주주조주식회사, 조선약업주식회사, 조선지업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전주약령시가 크게 약진한 해였고, 전주한지로 만든 부채와 지우산 등이 해외로 수출되며, 모두 절판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된다. 전주사범학교가 개교한다. 한편 같은 해 여름 대홍수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전주교를 제외한 모둔 다리가 유실된다. 

1948년 5·10 총선거가 있었다. 전북은 96.9%의 투표율을 보였다. 한편 총선거를 반대하는 시위가 남한 곳곳에서 있었다. 전북에서는 종방, 조선화물 등 2천여 명이 파업을 하고, 전주와 완주 일대에서 수만 명이 시위를 했다. 전주법원직원이 군정재판에 회부된 사건으로 판사, 검찰관, 변호사가 회의를 개최한다. 당시 “판사진에서는 우리는 법관의 양심으로 이 사실을 묵과할 수 없다”하여 전주법원 직원이 총사직한다. 

1960년 3·1절에 울리기 위해 주조에 들어갈 풍남문 완산종의 놋쇠가 부족해, 도민에게 기부를 호소한다. 6천근을 모았으나, 1천근이 부족했다. 한편 9월에는 전북교조가 교원의 노동조합을 인정하라며 “교단에서 쓰러질 때까지 수업을 계속하고 합법적인 교조를 인정받을 때까지 계속 단식투쟁”과 집단농성에 돌입한다.

1972년 전주시 교동과 풍남동에 한옥보존지역을 설정한다. 전주시 시정어머니회가 풍남문을 전주의 상징으로 정한다. <전주의 찬가(하중희 작사, 김강섭 작곡)>가 제정되었다. 전주와 서울간 고속버스 운행과 대한항공이 전주와 제주간 취항을 시작한다. 1984년 전주시가 제26회 풍남제에서 난장을 반세기만 개최하여 “민중 속의 잊혀진 숨결을 재현”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1996년 일본 북해도대학에 신문지로 싸여 방치된 동학농민군의 유해가 봉환되었다. 2008년 조선 태조어진이 3년 만에 전주로 환안되었다. 

2020년 3월 전라감영이 잊어버렸던 그 위용을 들어낸다. 역사를 복원하는데 100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김창주 전국공공운수노조 전주문화재단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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