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문화예술거리 랜드마크
등록문화재 익산 구 삼산의원
김병수선생 의원 1922년 개원
해방후 은행 사용 곳곳 흔적

# 이리 영정통이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다 

예전에는 번화해서 시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훌쩍 커 버린 후에 가보니 원도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한적한 거리가 되어버린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익산역에서 앞에 있는 익산 문화예술의 거리가 그런 곳이랍니다. 

문화예술의 거리라는 이름 밑에 ‘이리 영정통’이라고 쓰여 듯이 영정은 일제강점기 때 불렸던 이름입니다. 영정통 거리는 그 시대 가장 번화했던 거리였다고 해요. 

번화했던 거리는 세월이 흘러 도심의 인구가 감소하고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다른 도심지가 생겨나는 등 도심의 기능이 쇠퇴하였습니다. 익산시 중앙로 일대는 원도심의 특성을 살린 공간으로 활용되어 익산 문화예술의 거리로 조성되어 익산의 근대역사를 접할 수 있는 곳으로 변화하였습니다.

 

# 익산근대역사관의 건축 양식사적 가치

익산 문화예술의 거리에 랜드마크가 된 곳이 익산근대역사관입니다. 익산 근대역사관은 익산의 100여 년의 근대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역사관입니다. 

건물 자체가 등록문화재 제180호인 ‘익산 구 삼산의원’을 이전 복원해 놓은 것이라 근대 초기 건축물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옛 삼산의원은 익산시 중앙동 3가 114-2번지에서 있던 건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김병수 선생이 1922년 의원을 개원했던 건물입니다. 건축 벽면에 수평의 띠 모양을 돌출시킨 코니스 장식과 건물 입구의 아치형 포치 등이 무척 아름다운 근대 초기 건축물의 특징이 있습니다. 개인이 건립한 건물 중에서는 서양의 고전적 건축양식이 적용된 보기 드문 에로 우리나라에 서양의 고전건축양식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나타나는 과정과 고전건축양식이 근대건축양식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과도기적 건축 구성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양식사적 가치가 있다고 해요. 

1945년 해방 후에는 한국무진회사, 한국흥업은행, 국민은행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때의 모습들이 건물 내부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가 왼쪽 벽면을 보면 당시 사용했던 실제 금고도 볼 수 있고 1.2층의 유리창도 당시의 모습 그대로라고 해요. 내벽에 사용된 벽돌도 볼 수 있도록 내부 벽체 일부를 유리로 조성해 놓았습니다. 내부 전시실의 천장도 살펴보면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꾸며 놓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5년 등록문화재 지정 이후 장기간 공가 및 노후 된 건축물로 남아 있다가 소유주(정봉교)가 익산시에 기증하면서 2016년 5월에 이전. 복원이 결정되고 2017년 해체공사를 완료해 2019년 3월에 개원했습니다.

1층에 들어서면 근대문화유산기증 안내문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의 소유주 정봉교의 기증으로 ‘익산근대역사관’의 문을 열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1층에는 ‘이리. 익산의 근대, 호남의 관문을 열다’라는 주제로 이리의 변천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설명이 있는 상설전시실이 있으며 2층은 기획전시실과 교육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층 상설전시는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이리. 익산의 근대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리. 익산의 변천사를 저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리.익산의 근대, 호남의 관문을 열다’

01. 근대 이리의 출발

익산의 옛 지명 이리는 일본인들이 만든 지명이라고 합니다. ‘이리’라는 지명은 만경강 일대에서 자란 억새밭 지대에 작은 마을이 있는 것을 보고 ‘갈대밭 속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솜리’라고 불린 것을 ‘이리’라 고쳤다고 합니다. 1912년 3월 6일 호남선의 개통과 함께 지금의 자리에 이리역이 개설되면서 이리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남선 개통 이후 1915년 일본인 2,053명, 조선인 1,367명의 신도시로 발전했습니다.


02. 이리의 농장, 한국의 근대농업을 선도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토지를 수탈한 뒤 일본인 빈농들을 이주시켜서 그 밑에 한국 소작농을 두어 농장을 경영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1926년까지 무려 30만 명의 한국인이 농토와 경작지를 빼앗기고 만주로 쫓겨 갔으며 일본인 농민은 1만 호 가까이 늘었습니다. 1922년 한국 근대농업의 한 획을 그은 이리농림학교가 개교를 했습니다. 이리농림은 수원농림, 진주농림과 함께 조선의 3대 명문이었습니다. 이리농림은 근현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고 합니다. 

1920년대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에 힘입어 익옥수리조합이 결성되면서 대간선 수로가 건설되었습니다. 1백여 년이 가까워져 오는 지금까지도 농업용수와 산업용수로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03. 삼산의원과 김병수

삼산의원의 삼산은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병수의 호입니다. 김병수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5일의 군산 지역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같은 날 서울 남대문 정거장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군산 야소교병원을 거쳐 다음해에 익산에 삼산의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삼산의원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영정통에 개원하여  해방 후에는 한국무진회사, 한국흥업은행, 국민은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부는 삼산의원의 역사적 의미와 건축적 가치를 평가하여 2005년 6월 18일에 등록문화재 제180호로 지정했습니다. 


04 이리. 익산의 항일운동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국권을 잃자 익산의 유생 오하 이규홍(1881~1929)이 의병을 일으켜 (1907~1908년) 진안. 장수. 용담 일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수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80여 명의 일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후 상해와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1929년 순국했습니다. 이리. 익산의 3.1운동에서 기억할 만세운동은 3월 10일과 4월 4일에 벌어진 운동입니다. 4월 4일 이리시장(지금의 남부)에서 시작되었는데 마침 장날이라 3백여 명의 군중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 만세운동 과정에서 문용기 열사가 순국했습니다. 

이리. 익산의 신간회 운동과 운동가들의 활동도 활발했습니다. 이리농림학교 동맹휴학 사건도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이상운은 화랑회를 조직하여 김제경찰서 습격과 만경교 폭파사건을 전개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당했다고 합니다. 이상운 열사는 1945년 7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05 해방 후 이리. 익산의 변천사

해방 직후 전북은 건준이 해체되고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도, 각 시군에 인민위원회들이 조직되었습니다. 그 와중인 1947년 이리읍은 이리부로 승격되고 1949년 이리시가 되어 익산군에서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1977년 11월 11일에 화약적재 화물열차 호송원의 부주의로 이리역이 폭파되어 사망 59명, 중상 185명이라는 한국 철도사상 최대의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1980년 5월에는 이리에서도 민주화의 열기가 뜨겁게 타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리는 주현동 일대의 작은 리(里) 단위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어 이리역과 함께 근대도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리읍은 익산시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이리부가 된 것은 해방 후 1947년이었습니다. 47년이 흐른 1995년 5월 10일  통합 익산시가 출범하였습니다.

# 겨울방학에 알아보는 익산 100년의 근대 역사

이리. 익산의 변천사가 설명된 글을 다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전시실에는 이리. 익산의 71인의 독립유공자들 이름을 빼곡하게 써서 전시해 놓은 것으로 그들을 기리고 있었습니다. 
 
겨울방학이라는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익산근대역사관 상설전시실의 설명글을 읽으면서 익산 100년의 근대역사를 알아보는 시간을 아이와 함께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익산 문화예술의 거리와 익산근대역사관을 방문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익산근대역사관>
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중앙동2가 40-2
관람안내: 평일 및 주말 10:00~18:00
휴관일 : 추석 및 설 연휴, 매주 월요일
문의 063) 837-3545

/전북도 블로그기자단 '전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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