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와 사람 - 도립국악원 모보경 명창

전북무형문화재 지정예고
모 최승희명창에 소리익혀
10년 방황끝 전주대사습서
대상··· "창극단 공연 매진"

“6시간 완창을 했다. 이별가를 부르는 데 심사위원들은 눈물을 흘리고 어머니는 춤을 췄다.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지난 3월 전북무형문화재로 지정예고된 전북도립국악원 모보경 명창은 쟁쟁한 심사위원들을 앞두고 무려 6시간 완창을 하며 가슴 졸였던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어머니인 최승희 명창 밑에서 정정렬제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했던 모보경 명창은 당초 이번 지원이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권유로 문화재 신청 준비를 하게 됐고, 어렵사리 시험에 응하게 된 것이다.

자동차를 이동하는 시간마저 아까워 암기와 연습에 임했고, 아니리를 비롯해 감정과 연기 등을 다져갔다.

평소 칭찬이 인색한 어머니도 이날 심사가 끝난 후 ‘수고했다’는 칭찬을 할 정도였다.

20여년 만에 듣는 칭찬이었다.

40대에 접어들어 신체에 변화가 왔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완창무대에 초청받았지만 중간에 소리를 못하겠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심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2, 3년 전부터 원기를 회복하며 오늘의 영광의 밑거름이 됐다.

어린 시절 당초 전공은 무용이었다.

국악예고 재학중에도 무용과를 다녔다.

물론 어머니의 영향으로 소리를 병행했다.

태아 때부터 익힌 소리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예능의 길을 택했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시절에는 신입생임에도 관현악단 장단까지 맡을 정도로 예능의 끼가 다분했다.

타고난 끼는 잠시 외도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1983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했지만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감하게 국립창극단은 나와 일종의 ‘프리랜서’ 길을 걸었다.

영화에도 출연했고, 대중가수가 되고 싶어 음반까지 냈다.

하지만 10여년의 방황의 길 끝에 돌아온 것은 허탈하게 지난 세월과 텅 비어있는 주머니뿐이었다.

고향에 내려오라는 어머니의 권유가 왔다.

새로 시작하려니 불안했지만 큰 마음 먹고 전북도립국악원 시간강사로 다시 시작을 했다.

1998년으로 기억된다.

이듬해에는 완산국악대제전에 도전했다.

국악경연대회 첫 출전이었다.

대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맥이 끊겼다고 했던 정정렬제 판소리 부활을 알렸다.

객석은 환호하고 본선무대에는 꽉 찬 관중들의 호응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친김에 그 다음해인 2000년에는 판소리대회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전주대사습놀이에 도전했다.

대회 전날까지 몸이 풀리지 않고 심지어 수전증으로 출전조차 고민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고 굳게 다짐하면서 영양제를 맞는 투혼 끝에 영예의 대통령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게 됐다.

첫 출전한 전주대사습에서 명실상부 명창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대상을 받자 순간 어머니의 얼굴만 떠올랐다. 못난 딸로 인해 심하게 마음 고생한 어머니였는데, 보답을 하게 돼 매우 기뻤다. 지금 나를 있게 한 게 바로 어머니의 공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뿐 아니라 어머니가 평생 이뤄냈던 정정렬제 바디를 이어가야 할 숙명이 생겨났다.

지난 1998년 최승희 명창이 위암 수술을 받게 되자 정정렬제 바디가 끊기게 됐다는 소문까지 났다.

하지만 완산국악대제전과 전주대사습에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하면 보란 듯이 정정렬제 바디의 부활을 알렸다.

정정렬제는 판소리 여러 바디 가운데 제일 어려운 축에 속한다.

각종 고수대회에서 모보경 명창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부분 고수들이 정정렬제 바디를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별력이 생기지 않아 명고를 선별하는 데 필수조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정렬제 바디의 계승은 이제 타고난 운명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당연시 보인다.

특히 전북무형문화재로 지정예고된 만큼 그 책임감은 더욱 무거워졌다.

“하고 싶은 일은 많다. 창극단을 구성해 공연에 매진하고 싶고, 국악전공 학교를 세우고 싶지만 내 형편상 아직은 어렵다. 무엇보다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겠다. 정정렬제 소리를 퍼트리는데 기여하고 싶다. 정정렬제가 더 많은 사람들 입을 통해 불러지는 환경을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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