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재는 남고산성, 학산과 연계되어 있고 완산칠봉의 인근에 있는 걸어서 넘기에는 힘 들게 넘었던 고개이다.

일상의 생활이 깨져버린 현실에서 전주의 숨겨진 보고 해발 280m의 보광재는 우리의 삶의 고개요, 보부상의 고개였다.

우마차가 다닐 만큼 폭이 넓고, 지게를 짐고 넘던 고개의 거친 숨소리 속에도 희망의 날개를 펼치며 힘든 줄 모르고 넘나들던 어버이들은 시암골에 이르면 우마차를 힘겹게 끌던 소도 쉬고 마부도, 지게를 짐고 넘던 우리의 어버이들도 허기를 덜기 위해 물 한 바가지 마시고, 거친 숨 몰아 쉬며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바가지 마시고 넘나들던 보광재는 보덕화상이 창건한 구이 보광사 뒤편의 고개라 해 보광재, 또는 화객도(귀한 손님들이 넘어오는 고개), 복호항지맥(호랑이이나 곰이 엎드려있는 형상)이라 하여 복항재라고도 불리었으나 통상 보광재라 불렸다, 

구이에서 넘어오면서 재 꼭대기 오르면 송하진 지사의 현판과 보광정이 있으며, 오른편으로 가면 남고산성이요 외편으로 가면 평화동 학산이며전주쪽으로 쬐끔 내려오다 보면 설화가 있는 시암골에서 약수 한잔 마시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의 눈부심에 고개 돌리면 새소리, 계곡 흐르는 물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이마의 땀을 식혀 주는 바람과 도란도란 얘기하며 내려오다 보면 건강을 잃은 한 시민이 건강을 찾기 위해 쌓기 시작한 돌탑의 무리를 20여기 이상 만나기도 한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여름철에 미역감던 용천대, 동네를 지키는 당산나무를 만나면 인근의 한지생산 집단지이자 수묵화의 세계적 거장 남천 송수남화백의 유택과 기념관에서 뒤 돌아 보면 하성부지 천년향화지지라 하는 전의 이씨 효자의 명당과 관리하는 제각과 제각의 백일홍은 효자의 근본을 깨닫게 하고 계절의 아름다움을 절로 느끼게 한다.

이두수설화가 있는 미륵댕이의 석불 제작연대가 신라말 고려초라 하는데 관리가 잘못되어 코와 손목 부분이 부러지고 깨진 것을 임시방편으로 한 보수는 궁여지책으로 어이가 없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중국의 중원과 흡사하고 군사적 요충지이며 뛰어난 자연걍관에 취해 춤을 추자 타고 온 말도, 하늘도 땅도, 나무도 춤을 추었다는 두무소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근 학교에서 소풍을 가던 명소가 무분별한 개발로 추억과 기억속에서 만 찾는 곳 두무소가 되었다.

하늘천따지 소리가 낭낭하게 들리던 서당을 지나 흑석이 많아 일제치하시 석탄을 채굴한 흑성굴이 원형을 유지한 채 보존되어 있으며 흑석골 계곡물이 사납게 몰아친다 하여 공수내를 지역주민들은 다리 옆 막걸리집 딸 공수가 있어 떱떱하고 목이 말라 막걸리가 생각나면 공수네가서 막걸리 한잔하게 하여 공수내라 했다는 주민들의 재미난 얘기를 뒤로하고 미나리가 무럭무럭 자라던 미나리깡이 현재는 주택지로 바뀌고 풀무가 있던 풀무골이 발음상 변하여 불무골이 된 동네 어귀애는 천주교 신도들의 순교장소요 동학혁명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처형장 초록바우가 있으며 초록바위는 갈마음수격이라 하기도하고 전주천 물속에 비친 바위가 초록색으로 보여 초록바위라 하였다고 한다.

한때 선생님들이 모여 살아 선생촌이라 불려던 현 예술촌은 40여 예술인, 공방 및 작업실 30여곳, 책방3곳, 갤러리 8곳, 솜틀집, 됫박과 홉, 말로 쌀을 팔던 쌀집, 자전거 포, 이발소, 의상실, 양복점 등과 옛 골목길이 고스란히 보존된 예술촌의 졍경은 옛 것을 간직한 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예술촌.

초록바위는 곤지산 끝자락이며 초록바위 위에는 흡월대가 있어 곤지명월을 감상하던 정자는 오간데 없고 두무소는 무분별한 개발로 기억과 추억이 있는 곳으로 변했다.

그래서 당시 미역 감던 아이들은 이쯤에 큰 바위가 있어 다이빙한다고 뛰어 내린 곳 이라 더듬어 보며 보광재를 내려간다.

옛말에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훨 낫다고 하였다.

먼 곳을 찾기보다는 이웃과 주변에 있는 곳, 보광재를 찾아 힐링과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면서 보광재가 없어 겨울철에 땔감이 전주로 오지 않았다면 엄동설한 추위를 어떻게 보냈을까?

전동성당 담벽과 풍남문 인근에서 땔감을 팔아 막걸리 한잔에 가족들이 먹을 쌀 한 됫박, 생선 한 마리를 메달고 가족들에게 가는 즐거움이 있었던 보광재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서로 돕고 사는 상생의 교훈이라 생각해 본다.

/박영진 한중문화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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