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향교 중 가장 오래돼
정충복비 임진왜란 때 정경손이
장수향교 지킨 의행기리려 세워

주논개 충절 기리기 위한 사당
첫 영정 그린 화백 친일전력에
장수군 전국 현상 공모로 교체

# 추억의 장소에서 만나는 향교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가는 길입니다. 장수 향교는 장수 초등학교와 담을 맞대고 있어 기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늘 지나던 곳이었습니다. 그때는 참 담이 높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 담은 높지만 손을 뻗어 향교 안의 모습을 찍을 수 있으니 조금은 키가 자랐나 봅니다. 문득 마음도 그만큼 자랐다면 좋았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장수향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향교 중 가장 오래됐습니다. 조선 태종7년(1407년)에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장수읍 선창리 당곡에 창건하여 숙종 12년에 지금의 이곳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처음 창건한 곳이 협소하고 지대가 낮아 침수가 되는 일이 빈번하여 이전하였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그 흔적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 향교의 대다수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의 전쟁을 겪으면서 그 원형이 소실되었지요. 그러나 장수 향교는 향교를 지키던 충복 정경손의 충절로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탓일까요? 장수향교하면 정경손이 떠오릅니다. 


문화관광해설사 안충현님이 안내를 하셨는데요. 향교를 둘러보기 전에 장수에 대해서 알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장수의 2덕德(황희정승, 백장선생(고려문관)), 3절節(정경손, 주논개, 순의리 백씨), 5의義(호남의 병장 전해산, 문태서, 박춘실, 독립운동가 백용성, 한글학자 정인승)에 대한 설명을 하셨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전할 수 없는 아쉬움에 장수3절 중 한 분인 순의리 백씨의 비가 있는 타루비의 개요만 잠시 짚어볼까 합니다.

 

# ‘눈물을 흘린다’는 뜻을 가진 타루비와 꿩과 말을 새긴 암각화

조선 숙종4년(1678) 당시 장수현감 조종면이 전주감영에 가기 위해 말을 타고 천천면 장척마을 앞 바위 비탈을 지나는데, 길가 숲에서 졸고 있던 꿩이 말발굽 소리에 놀라 날아오르다 현감을 태우고 있던 말이 놀라 날뛰어 현감은 말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되자, 주인을 잃은 백씨는 자기가 잘못하여 현감이 죽었다 통곡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원한의 꿩과 말, 그리고 타루 두자를 바위벽에 그려놓고 자기도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한다. 그 후 1802년 장수현감 최수형이 주인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현지에 비를 세우고 타루비라 하였다. (장수군청)

향교 입구에 세워진 하마비는 이곳은 신성한 공간이니 누구든 말에서 내려 정숙하게 행동하라는 의미라고 하는데요. 하마비를 지나 홍살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공적비와 향교에 대한 설명이 있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앞서 장수향교가 예전에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향교를 지키던 정경손의 충절 때문이라고 했는데요. 임진왜란 때 왜장 고바야가와의 부장 안코쿠시가 장수에 침입하였는데, 우리 조선인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삼는다는 소문에 모두 집안에 숨어 거리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고 합니다. 장수현감을 비롯한 모든 관군들도 도망쳐 버렸는데 향교의 교직이었던 정경손만이 교복을 입고 경서를 외며 문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거듭 향교에 들려는 왜적에게 정경손은 외쳤습니다. “이곳은 성인들의 위패를 모시는 신성한 곳이라 들어갈 수 없다. 만약 들어가려거든 먼저 내 목을 베고 들라.”
흔들림 없이 늠름한 기상에 감복한 왜장이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는 쪽지를 남겨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경손의 의행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우고 정경손의 호 충복을 따서 정충복비라 하였습니다. 

 

# 해설사의 동행으로 깊어진 향교 이야기 

해설사를 따라 외삼문의 세 개의 문중 오른쪽으로 들어갑니다. 향교에 문을 드나들 때는 ‘동입 서출’이라 하여 동쪽으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운데 닫혀 있는 문은 언제 사용할까 궁금했는데요. 귀신이 다니는 신도神道라하여 일 년에 두 번 있는 석전대제에 음식을 나를 때 열린다고 합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있는데요. 명륜당은 당시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학공간이었지요. 명륜당 뒤로 은행나무가 있는 뜰을 사이로 동재와 서재가 자리합니다. 어느 향교나 가면 은행나무가 있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하네요. 은행나무는 잎이 많아 시원하고 은행잎의 독특한 향을 벌레나 해충이 싫어해서 공자가 그 은행나무 아래 단을 쌓고 제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행단’이라는 말의 유래가 예서 나왔다 합니다.

내삼문을 지나 비로소 보물 제272호로 지정된 대성전과 마주하게 되는데요. 마침 오늘은 음력 초하루로 분향(음력 초하루와 보름)을 하는 날입니다. 분향을 하는 동안 잠시 향냄새에 취해봅니다. 향교의 제 의식으로는 매월 두 번의 분향과, 춘계와 추계 두 차례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가 있는데요. 올해 춘계 석전대제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취소되었습니다. 장수 향교 대성전은 정면3칸 측면4칸의 단층 맞배지붕인데요. 밑보다 위가 더 넓은 가분수입니다.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장수에 대한 얘기를 듣느라 일정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정충복비에 목례를 하고 홍살문을 나와 논개사당으로 향합니다.

# 주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의암사

의암사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주논개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인데요. 장수현감 정주석이 주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846년 논개생장향수명비를 세운 후 1955년 군민들의 성금으로 남산에 사당을 건립하였다가 1974년에 현 위치로 옮겼습니다.

주논개의 탄생이나 성장과정,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소 다른 의견들이 있기도 한데요. 장수군에 보관된 기록에 의지하여 얘기하고자 합니다.

의암사보다 논개생가지를 먼저 둘러보는 것이 논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오늘은 장수 향교 가까이에 있는 의암사를 찾아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봄꽃이 만연할 때의 논개생가지의 모습을 몇 컷 올려봅니다.

봄꽃이 이렇듯 아름다울 때에 오시면 논개생가지 주변 대곡저수지에 아름드리 벚나무가 흐드러지게 꽃잎을 달고 꽃의 터널을 만들어 내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전북기념물 제46호인 의암사는 특히 가을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의암사가 있는 의암공원 일대는 장수군 대표적인 축제인 ‘장수한우랑사과랑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한데요. 최근에 공원 안에 조성된 오토캠핑장을 지나는데 캠프족들이 많아 사실 좀 놀라기도 했습니다. 돌계단을 올라 사당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논개기념관이, 논개생장향수명비는 오른쪽에 자리합니다.

드디어 의암사에 올랐습니다. 건립 당시 논개 영정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렸으나 그의 친일 전력이 알려져 충절의 논개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제로 뜯어내게 되었습니다. 이후 장수군과 진주시가 공동으로 전국 현상 공모하여 제작하였는데요. 현재 의암사에 걸린 논개 영정은 지난 2008년 충남대학교 윤여환 교수가 새롭게 그려서 안치했습니다.

제가 신안 주씨 후손들 중에 스무 살의 여성 평균 골격과 얼굴형을 참고해서 일일이 점을 찍어서 그린 것으로 어느 방향에서 봐도 논개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는데 요. 사실 유리에 기자의 모습이 비쳐서 사진 찍기가 참 난감했습니다. 

충의문 사이로 의암공원이 보입니다. 의암호 푸른 나무 아래 앉아 스물이라는 어린 나이에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의기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전북도 블로그기자단 '전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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