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고수 청계본 상태 완벽
19세기말 사설형태 온전히 담아

동리 신재효 선생이 쓴 판소리 사설집 필사본이 완질로 발견됐다동리 신재효 선생이 쓴 판소리 사설집 필사본이 완질로 발견됐다.

1906년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이 필사본은 100여년이 지난 시점에도 거의 완벽한 상태로 우리 곁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필사본은 고수 청계본으로 1900년대 초기 학정 박정림 선생이 삼농당 정자에서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필사본은 이병기 선생이 필사한 가람본이 많이 알려졌고, 강한영 선생이 필사한 새터본, 북으로 넘어간 김삼불이 필사한 김삼불본 등이 있지만 모두 1940년대 이후 이뤄진 것이다.

때문에 이번에 발견된 필사본을 계기로 고수 덕동본과 흥덕본도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는 기대가 가지게 됐다.

신재효 선생은 판소리 열두 바탕 중 여섯 작품을 개작해 우리에게 전해줬다.

이를 통해 19세기 말 판소리 사설 형태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변강쇠가는 신재효 선생이 개작해 남겨 준 필사본이 유일해, 이 필사본이 없었다면 작품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던 게 현실이다.

반면 개작이 이뤄지지 않은 나머지 여섯 작품은 판소리로 전승되지 않아 판소리로서의 실상을 현재로선 전혀 알 수 없다.

신재효 선생은 여섯 작품을 개작했을 뿐 아니라 단형 판소리인 오섬가와 광대가, 치산가, 도리화가 등을 직접 창작해 판소리 영역을 넓히는 노력도 했다.

선생은 개작한 여섯 작품과 창작작품 그리고 이전부터 전승되던 단가 등을 일일이 필사해 후세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시간이 지나면서 손상이 됐고, 후손들은 원본을 다시 필사해 그 마멸을 대비하기도 했다.

이 때 필사한 것은 원본과 같이 한글로 쓴 것과 정확한 이해를 위해 한자를 병기하거나, 국한문 혼용으로 쓴 두 가지가 있었다.

이렇게 해 읍내본과 성두본이 만들어졌는데, 신재효 선생이 직접 만든 원본은 그 소재를 알 수 없으나 그나마 필사본이 남게 돼 천행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재효 선생의 사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학문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이후다.

하지만 그 전에도 이미 고창에서는 그 가치를 인식하고 전승을 위해 필사 작업이 진행됐다.

이번에 발견된 고수 청계본은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된 것 뿐 아니라 연구를 통해 신재효 선생의 판소리 사설이 어떻게 이뤄졌고, 전승됐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또 1900년대 초기 언어 사용방식과 판소리를 수용하는 선인들의 태도 등도 함께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동리문화사업회 이만우 이사장은 “험난한 세월을 지나면서 고수의 청계본이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신재효 선생이 고창을 판소리의 성지로 만들었다는 구체적 실중 자료가 확인되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며 “동초 김연수 명창이 이 사설을 참고하면서 동초제 판소리를 만든 것과 같이, 신재효 선생의 사설은 앞으로의 판소리 발전에도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중한 자료를 잘 간수해 빛을 볼 수 있게 해준 소장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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