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전주 호수 전국 3번째
전라도의 수부 전라감영 위치
전주부성 18만평 한강이남 최대
백제~고려까지 국가부흥 근거지
동학-항일의병-민주운동 발상지
경기전-완판본-향교 등 유적풍부
전라도 전북-전남 나뉘며 홀대로
한국학호남진흥원 전남 설립예정
호남학부흥운동 주도권 되찾아야

전라감영 복원이 드디어 완성됐다.

전북도와 전주시는 과거 찬란한 역사를 지녔던 전라감영 복원 작업을 완성함에 따라 전북의 위상이 한 단계 올라갔음을 기대하고 있다.

전라감영이 있던 전북은 호남 또는 전라도의 중심지였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전북이 중심이 돼 전남과 제주를 아울렀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주도권이 전남으로 쏠린 게 사실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 저울추가 전남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전라도의 중심이었던 전북은 외면당했고,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희망조차 없는 곳으로 전락할 우려가 깊다.

전라감영 복원을 계기로 전북의 위상을 높이고 과거 영광을 재현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편집자주


 

전주는 전라도의 수부였다.

전라도는 농경시대 제일의 곡창지대로 매천 황현은 일찌감치 ‘호남은 남쪽의 울타리로, 산천 경계가 뛰어나고 물산이 풍요로워 온 나라가 먹고 입는 자원의 절반을 호남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호남의 중심이 전주로, 전라감영이 소재해 현재의 제주도를 포함한 전남북 지역을 총괄한 것이다.

조선후기 정조 때 ‘호구총수’에 의하면 전주의 호수는 전국에서 3번째로 많고 인구수는 전국에서 5번째로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풍남문 안쪽에 걸려 있는 ‘호남제일성’이란 편액이 이를 말해준다.

또 전북 그리고 전주는 고려시대부터 전라도를 대표하는 곳이었다.

그 근거로 전라도를 순찰하는 안찰사영이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관장에 따르면 전주는 신라 9주의 하나로 이미 지방 통치의 거점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은 고려시대로 이어져 조선시대 관찰사와 비슷한 안찰사가 파견됐고, 전주에 안찰사영이 설치됐다.

이것이 조선시대에 그대로 이어져 이후 전라감영으로 더 강화됐다는 것이다.

전주부성은 면적이 18만여평으로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성이었다.

북쪽에는 평양과 함흥, 남쪽에는 전주와 대구성이 큰 성곽이었다.

하지만 대구성은 전주성의 3분의2 정도에 불과했다.

전주부성은 오느날 전주시청인 전주부영 뿐 아니라 전라감영이 자리했다.

한국역사에서 전북은 중심축에 있었다.

전북대 하태규 교수에 의하면 전북은 마한백제로 이어지는 초기 국가 역사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터전으로 전개된 역사는 한국사의 중요한 축을 형성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마한의 중심세력이 금마에 있었다.

백제시대에는 금마를 한 때 수도로 경영해 국가부흥의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백제 멸망 후에는 견훤이 전주를 수도로 후백제를 세워 후삼국 쟁패전을 벌였고, 고려시대에는 통제 정책에 의해 차별을 받았지만 무신집권기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전주는 조선왕조 풍패라는 의식 속에서 국가적 관심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물론 병자호란까지 호남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과 관군의 역할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전북은 국가재정의 보급지이며, 지배계층을 부양하는 곡창으로 다른 지역보다 물산이 풍부했다.

이로 인해 국가와 지배층의 수탈이 가중됐고, 이 결과 혁신적 사회사상과 저항정신이 먼저 일어난 곳이다.

한말의 동학농민혁명과 항일의병활동, 현대의 민주화운동이 그것이다.

문화적으로 보면 백제 미륵사 등 불교 문화가 꽃을 피웠고, 우수한 고려청자가 생산됐으며, 굵직한 선비들이 배출됐다.

또 조선 후기 실학의 발달과 천주교가 깊숙이 스며들었고, 조선 중기 이후 가사문학이나 판소리 등 사대부 뿐 아니라 서민과 여류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

전북이 과거 전라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하는 문화적 자료는 수도 없이 많다.

전라감영을 비롯해 경기전, 완판본, 향교, 의병, 동학농민혁명 등이 다수의 키워드로 떠오른다.

전북은 백제시대부터 후백제까지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실의 본향으로 전라감영이 위치한 호남제일성으로 곳곳에 많은 유적이 있다.

조선말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해 처음으로 관민협치가 실시된 땅이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 어진이 봉안됐고, 조선왕조 시조 사당 조경묘, 시조 묘역인 조경단이 있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남았던 조선왕조실록 역시 전주사고가 보관했던 것으로 당시 조선 시대 4대 사고 중 지역민들이 사력을 다해 수호한 결과다.

전북은 문화예술의 고장이다.

한지의 본가로 전주부채와 전주에서 찍어낸 완판본과 관련된 유적이 풍부하다.

또 많은 천주교인들의 성혈이 흐르는 천주교 유적과 호남지방 개신교회의 선교부가 위치했던 종교적으로 많은 역사가 남은 땅이다.

이 지역을 전라도 또는 호남으로 부르는 이유는 널리 알려져 있다.

전라도란 명칭은 전주와 나주의 앞 글자를 합해 만들어졌다.

호남이란 명칭 사용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김제의 벽골제 아래를 호남, 오른쪽을 호서라 칭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김제 벽골제를 경계로 전라도를 호남으로 부르고, 충청도를 호서라 부른다’고 했다.

호남의 명칭 사용은 고려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여말선초부터 사례가 발견되면서 조선 성종 때 자연스럽게 사용됐다.

즉 조선 중기 이후 호남이란 명칭이 전라도를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된 것이다.

최근 들어 지방분권화 시대가 진전이 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전북은 전라감영 복원을 계기로 화려했던 옛 과거를 찾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라도 특히 전북이 한국 역사 속에서 수행했던 역할이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좌절과 패배의 경험에 의한 부정적 인식이 더욱 크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과거 하나였던 전북과 전남이 둘로 분리되면서 전북의 홀대론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어느 순간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 뿐 아니라 광주에도 전라감영 역할을 하는 도청이 들어서게 됐다.

조선 시대 정치, 경제, 문화 모두 감영 소재지에 있었지만 분도가 되면서 전북은 뒷걸음치게 되고 상대적으로 전남이 부상하게 됐다.

분도는 전남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게 됐고, 이게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호남문화재연구소는 전남 담양에 본부가 있고 전북엔 지부만 있다.

한국학호남진흥원 전북에서 우왕좌왕 하는 바람에 전남에 건설 예정이다.

입지 문제를 비롯해 예산, 연구자 배분 등의 협의를 하는 와중에 광주는 2014년 조례를 제정하고, 올해 5월 설립을 확정했다.

전남 역사학자들의 적극적 행보로 전남과 광주를 중심으로 한국학호남진흥원이 추진되면서 전북 역사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2선으로 물러나야 했다.

역사적으로 전라의 중심이었던 전북이 이제는 ‘호남’이란 네임 밸류 주도권을 놓친 상황이 된 것이다.

사학자들은 “호남의 주도권이 전남에게 넘어갔다기보다는 이 지역에 대한 애정의 결과가 오랫동안 축적되면서 빚어진 결과다”며 “지금이라도 호남학 부흥운동을 통해 과거의 모습대로 다시 돌려야 할 때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관장은 “전주는 조선왕조 내내 전라감영이 소재한 전라도 수부였고,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다. 현재까지 전라도 내지 전북권 중심으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그 중심에 전라감영이 있다”며 “전라감영은 전주의 정체성이다”고 말했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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