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야사-임광순










정치야사-임광순

운경(雲耕)
이재형(李載灐)은 국회의장을 역임한 7선의원이었다.
시흥에서 선조 제7왕자 인성군의 10대 종손으로 태어나 경기중학에 입학, 교내 스트라이크를 주도하다 퇴학당하고 배재로 옮겨 졸업했으며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했다.
1946년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가입, 5.10선거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0년 5.30선거에 무소속으로 2대국회에 진출한 그는 부산피난국회에서 '발췌개헌안'을 만들어 낸 주역이었다.
그의 별명은 '도마뱀'이었는데 평소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걷는 걸음걸이가 도마뱀을 닮기도 했지만 거기에다가 꼬장꼬장한 성격을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역시 성격이 꼬장꼬장하기로 소문난 곽상훈의원이 어느 날 국회에서 이승만 정권의 친위세력들을 공격하는 발언을 했다
"족청이 이대통령을 등에 업고 개같은 짓을 하고 있다. 개새끼들이 나를 못살게 굴고 있다".
그러면서 일예로 이재형을 지목했다.
그리고 얼마 후 국회본의회의장에서 갑자기 "악!"하는 비명이 울렸다.
개새끼 소리를 들었던 운경이 곽상훈의원의 뒤로 가만히 다가가서는 그의 귀를 물어뜯은 것이었다.
귀를 싸안는 곽상훈의원을 보며 이재형이 한마디 내뱉는 말, "나 보고 개새끼라고? 어디 개한테 물리는 맛이 어떤지 봐라"
3대 민의원에 출마했다가 족청탄압으로 중도사퇴한 운경이 4대총선에 나섰을 때도 역시 극심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의 가두연설장에는 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은 스피커소리만 앵앵거릴 뿐 청중은 아예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말하는 사람도 운경 하나요 듣는 사람도 오직 이재형 한 사람이었다.
이 후보는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다.
" 밭에서 밭을 가는 남정네는 괭이를 놓고, 집에서 어린애에게 젓을 물리고 있는 아낙네들은 잠시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1966년 3월 30일 창당된 신한당(新韓黨)에 이재형은 자신의 계보인 사직동파를 이끌고 합류했다.
선명야당을 내세운 신한당은 창당을 앞두고 대 국민 유세에 나섰다.
해위 윤보선과 대변인을 맡고있는 김수한과 그리고 이재형이 주력연사였다.
박정권의 탄압이 극심한 터라 스피커 하나 마음놓고 빌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유세단과 기자들을 태운 마이크로 버스에 스피카와 밧데리를 싣고 다니며 유세를 해야했다.
가히 선동연설의 일인자였던 김수한 대변인이 청중을 끌어 모으는 연설로 막을 올리면 이재형이 느릿한 말로 그러나 논리정연하게 대중을 설득했고 해위가
마지막을 장식하는 순으로 유세단은 전국을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원에 도착했다.
경찰은 총 동원되어 주민들의 근접을 막았고 그들은 드럼통을 연단삼아 청중 한 사람없는 앞을 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날아가는 새는 들어라! 흐르는 시냇물아 귀를 기우려 다오"
운경은 골프를 좋아했고 젊은 시절에는 '싱글 스코어'의 수준을 유지한 골퍼였다.

신용남과는 골프동호인으로 군자리에 있는
서울컨트리클럽의 '군자회'의 같은 멤버였고 함께 필드에 서기를 여러차례였다.
6.8선거때 공화당으로 고창에서 출마한 신용남은 김상흠을 상대로 일단 승리했으나 부정선거로 인한 선거무효판정을 받고 재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신민당에서는 유진오, 유진산, 김대중과 더불어 이재형이 지원연사로 고창에 내려왔다.
운경은 연단에 오르더니 모르는 척 신용남을 공격했다.
"신용남이는 골프밖에 잘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올시다. 평소 골프나 즐기는 사람이란 말예요, 그 넓은 땅을 차지한 군자리의 골프장에 콩을
심으면 얼마나 많이 거두겠습니까."
그러고는 단아래로 내려와서 신용남을 만났다.
시치미를 뚝 떼고 운경은 능청을 떨었다.
"거 고생이 많지?"
골프장 시설이 지금 같지않은 시절, 나인 홀의 중간쯤 페어웨이에 두레박이 매달린 우물이 있었다.
여름 철이면 라운딩 도중 빼놓지 않고 골퍼들이 이곳에 들러 시원하게 목을 추길 수 있는 즐거운 장소였다.
 어느 여름 날, 신용남은 우물에 도착해 막 물을 길어 올렸는데 저쪽에서 운경이 우물을 향해 오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본 중앙대 선배인 운경에게 먼저 두레박 물을 양보해야 되었지만 신용남은 모른 채 하고 물을 마셨다.
그 사이 우물 가까이 와 있는 운경에게 신용남은 다시 물을 퍼올려 주려고 했다. 그런데 운경은 그냥 두레박을 달라고 하더니 두레박의 윗 물을 버린
다음 남아있는 바닥 물을 마시고는 한마디했다.
"그래도 두레박에 먼저 들어간 물은 위 아래가 있겠지."
우물 안의 물로 보자면 위에 있던 것이 먼저 두레박에 들어 갔을 테니 윗 물이 두레박 아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 무렵 야당은 진산계와 운경계의 두 산맥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1969년 가을 유진오 신민당 당수가 '삼선개헌반대투쟁'을  진두지휘하다가 쓰러저 사실상 당수직이 공백상태가 된후 유진산은
"개인의 병이 당의 병이 될 수 없다"며 나섰고 70년 1월 전당대회에서 당수가 된다.
어떤 기자가 운경에게 진산과 맛서는 그의 소감을 물었다.
운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필귀정(蛇必歸井)이오"
진산의 별호가 '능구렁이'였기에 이를 빗댄 말이었다.
유진산 이재형 정일형 3자가 대결한 당수선출에서 운경은 불과 50표의 차이로 진산에게 석패하는 바람에 당권을 놓쳤고 그 해 2월8일 신민당을 탈당,
정계은퇴에 들어갔다.
그는 '위장야당'이라고 진산의 신민당을 비난했고 "나는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국가민족의 운명을 담당할 민족주체세력을 모으고 키우는 일에
나의 작은 능력이나마 보탤 수만 있다면 아직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탈당성명을 냈다.
그의 성깔은 소문이 자자했다.
장녀 봉희를 시집보낼 때의 일화 한토막.
신랑은 헌병사령관을 지낸 원용덕의 장남이었는데 신랑친구들이 함을 지고왔다.
신랑의 친구들은 기세당당하게 몰려와 신부집앞에서 외쳤다.
"이리오너라"
 바로 그 때 신부의 아버지 운경이 벽력 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 나갔다.
"이놈의 자식들! 그래 이리왔으니 어떻게 할 거냐!"
혼비백산 도망치는 함재비들을 따라 뛰며 신랑이 하는 말 "거봐라, 내가 뭐라구 그러데, 얌전히 놓고 오라고 했잖아!'
운경은 돈에 인색한 것으로 이름이 높다.
모 경제신문의 이진원기자가 사직동을 찾아가 환담 끝에 운경에게 넌지시 물었다.
"선생님, 밖에서 사람들이 선생님 별호를 '장아찌'라고 하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자 운경은 빙긋이 웃고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김기자앞에 살랑살랑 흔들었다. 잔돈 소리가 짤랑짤랑 들렸다.
"돈은 쓰는 게 아니고 소리만 내는 거야. 돈이란 이렇게 주머니에서 이렇게 소리를 낼 때만 제 구실을 하지. 만일 이 돈을 꺼내어 다
나눠주고 나면 이 돈이란 놈은 사람까지 데리고 달아나 버리거든"
소석이 80년대 후반 '통일준비국민회의'를 만들고 운경에게 고문을 맡아달라고 청했다.
건강이 좋지 않고 보행이 불편한 운경이었지만 흔쾌히 승낙하고는 결성식 날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 그 수많은 계단을 올라 꼿꼿한 예의 모습으로 회의장에
들어섰다.
행사를 끝내고 감사전화를 건 소석에게 운경은 사직동 자택에 들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택을 찾은 소석에게 운경은 "소석이 혼자 고군분투하는데 늙어가면서 돕지를 못해서 미안합니다. 절대로 굴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세요.
소석만 믿어요"
잠시 후 소석이 자택을 나오려하자 운경은 안방 벽장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미약하지만 내 정성이니 받아요. 단체를 꾸리자니 소석도 좀 어렵겠소"
 1천만원, 당시로는 큰 돈이었다.
'짜다'고 짜하게 소문난 운경, 그러나 쓸 곳에는 크게 쓰는 거인의 풍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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