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익을 분배하는 예술··· 광해군은 진보였다

광해군 공명첩-속죄은등 발행
양반 탐학-기득권층 경멸 담겨

조선 역사에서 안타까운 최고의 순간이 인조반정이라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서인들이 깐깐한 군주를 몰아내고 고른 것이 조선 3대 暗君 중의 하나였으니, 순서대로 연산군/인조/고종이 될 듯 합니다, 온갖 병자호란 당시의 수모를 당한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이후 조선 건국 초기의 건강함을 모두 잃죠.

조선 중기, 특히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까지의 한국 역사에 가장 박식하다고 느끼는 <한명기>교수의 책입니다.

이외에 그가 쓴 '병자호란'과 '조선시대 왕위계승사'를 읽었습니다만 핵심은 이 책이었습니다.  

내용을 리뷰하기는 무엇한데요.

어느 학자가 <한명기>교수가 <광해군>을 평가하기를 '외교는 최고이지만 내치는 실패했다.'고 기술했다는 일부 견해가 있었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종묘, 창덕궁, 창경궁, 등의 순서로 재건했는데요.

저는 창경궁 이상은 약간 과했다는 느낌 이외엔 내치에서 광해군의 큰 잘못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재미있는 역사가 16세기 중국의 도자기 등이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고,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서 생산한 銀을 중국이 거의 빨아들이듯이 가져오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함대에 패하고 은이 부족해지자, 명나라가 광해군 재위 내내 조선의 은을 쓸어갑니다.

또한 이때 후금을 치는데 원병을 요구한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금이나 은을 바치는 하층민들에 공명첩을 나눠줘 명목 뿐이지만 벼슬아치가 넘쳐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치적 의사까지 여론화했다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나누어 전국 팔도를 돌며 양반들의 탐학과 백성의 고통을 직접 본 광해군의 경험이 기득권층에 대한 은근한 경멸로 이어져, 공명첩, 속죄은(贖罪銀), 납속책 등을 거리낌없이 발행하여 깊은 갈등이 쌓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후 아무런 명분이 없는 인조반정에 신하 상당수가 동조하는 비극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 서인들의 어리석은 판단이 실수라고 전혀 느끼지 않았겠지만요.

놀라운 것이, 역사는 반복되는지 요즘 정치판의 정쟁도 기저에 같은 갈등이 흐르고 있다 여깁니다.

<광해군>은 제겐 진보로 읽힙니다.

정치는 이익을 분배하는 예술인데요. 예술이 되려면 모두가 조금의 섭섭함만 있는 정도가 가장 적절할 텐데, 지금 인기 대선주자들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재목이 전혀 안 보입니다.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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