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도덕하고 무능한 정권 백성 고난에 빠트려

침략 선정포고에도 무사안일 대응
여진원군 수용 안해 정유재란도

부도덕하고 무능한 정권이 얼마나 백성을 힘들게 하는 지 보여 주는 책입니다.

제가 읽은 모든 책 중에서 현재까지는 가장 슬펐던 책입니다.

신음이 토해집니다.

1장부터 이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91년 1월 조선통신사 편에 명나라를 정복하려 하니 길을 내라는 서신을 보내 조선의 백성들까지 곧 모두 전란이 닥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합니다.

자신보다 더 쎄다고 생각하면, 러시아나 미국등에게는 선전포고도 없이 다롄이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는 야비한 술수의 대명사 일본이 보기에도, 얼마나 16세기의 조선이 얼마나 허접쓰레기 같았으면 친절하게 선전포고를 해줬을까요.

그런데 설마 오면 얼마나 오겠느냐며, 기껏 남해안이나 영호남에 노략질 정도로 그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합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장군을 6계급 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는 단 하나의 하찮은 대책만 행하는데 아시다시피 이것이 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최고의 한수가 됩니다.

당시 전라좌수영에 장부에 30척이 있어야할 판옥선이 불과 5척 밖에 없었지만, 계속된 독려로 임진년 당시에 거북선을 빼고도 총 29척으로 되었습니다.

난리를 미리 대비한다지만 무사안일에 빠져있던 경상좌/우수사와 전라우수사의 관할지역과 비교한 <이순신>장군의 유별남을 친우 <유성룡>과 선조가 지지해 주었습니다.

다행이었죠.

1592년 4월 전란이 시작되고, 어리석은 <신립>이 탄금대에서 조선의 주력 기병을 너른 벌판에서 조총에 노출시켜 학살당하고 한양이 풍전등화 상태가 됩니다.

몽진, 즉 도주 밖에 방법이 없는데 조정의 중신들이 반나절 동안 함구하다가 당시의 영의정 <이산해>가 몽진을 거론하자마자 후대에 대의명분을 잃은 신하로 기록되기 싫었던 위선적인 중신들이 모두 겉으로만 극렬 반대를 하긴 합니다.

평안도 영변까지 몽진 도중 여차하면 명으로의 망명을 꿈꾸는 한심한 선조와 다수의 결전파 중신들이 대립하다가 사상최초로 세자 광해군과 분조를 결정합니다.

광해군의 분조가 성립되자 구심점이 생겨 백성들의 항일 정신을 일으켜 왜란 승리의 또 다른 전기가 됩니다.

수 년 후 왕권이 약화된 선조가 심심하면 광해군에게 양위하겠다는 양위 소동을 벌이는데 <한명기>교수 논문에는 선조가 죽기 전까지 총 15차례 쌩쑈를 벌였답니다.

평안도로 <고니시>의 군사들이, 함경도로 <가토>의 군대가 진군했었는데, <가토>의 군대가 당시 통일을 이룬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과 맞부딪칩니다.

분명히 여진의 인명피해가 더 컸다는데도 여진의 강한 전투력과 임전무퇴의 정신에 질려서 왜군의 기가 죽었답니다.

이는 명나라 만을 생각했던 <도요토미>의 계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합니다.

뒤에 <누르하치>의 여진이 조선을 돕는 군사를 보내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들에게 조선 영토의 허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선조가 극구 거부합니다.

역사의 만약에서, 선조가 여진의 원군을 수용했다면 정유재란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여진의 군사력 손실도 필연적으로 따라왔을 것이고 명나라의 멸망이 없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이 정유재란 때에 한양까지 진군하지 않은 이유도 복잡한 국제적 셈법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일본군과 여진의 조우가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한양에서 봤을 때 오른쪽인 영남 우도에서 주로 <남명조식>의 후계들이 의병을 일으켜, 주로 왜군의 식량 보급선을 노려 활동을 합니다.

<이순신>장군 수군의 대활약과 함께 왜군의 보급에 치명타를 줍니다.

당시 조선은 왜란 수 년 전부터의 가뭄으로 왜군 식량의 현지 조달이 어려웠다 합니다.

임진왜란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선조와 조정은 백성을 폭도로 보기시작하고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었던 의병장 <곽재우> 등은 홀대하고 모욕당하고, <김덕령>은 누명을 씌워 죽입니다.

의병에게는 군량의 공급도 하지 않고 명나라 군사의 지원 업무가 지워집니다.

전장에서의 모든 힘들고 지저분한 일들이 모두 의병들의 차지가 됩니다.

먹지도 입지도 자지도 못하고 온갖 전쟁 노역에 밤낮으로 동원됩니다.

전투 중에도 가장 위험한 성곽 수리에 동원됩니다.

결국 의병들은 흩어집니다.

조정이 노린 것은 의병의 해산이었습니다.

명군이 참전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명나라의 <이여송>이 왜군을 깔보다 벽제관에서 참패하고는, 전쟁비용 등의 문제로 왜군의 술수에 말려든 외교교섭으로 왜군을 지금의 경남에 남기고 소강 상태에 들어가고 1592년에 왜군을 패퇴시켰던 진주성이 1593년에 함락됩니다.

전란을 끝내고 싶어 조급한 선조와 조정이 <이순신>장군의 수군에게 공격을 명하나, 아시다시피 용이하지 않음을 장군이 밝힙니다.

3도의 군사들이 따르는 <이순신>장군의 병권과 백성들의 지지에 내심 위협을 느꼈던 선조가 백의종군 시키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올립니다.

<원균>이 등장하고서 수군 내에서는 '왜적을 만나면 도망이 최선'이라는 분위기가 퍼지고, 공격할 수 있다고 여겼던 <원균>도 막상 공격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미적대자, 도체찰사 <이원익>의 명으로 <권율>이 6월 18일에 곤장을 때립니다.

그래도 공격을 않자 7월 10일에 <권율>이 다시 곤장을 때리고, 울분에 찬 <원균>이 폭음을 하고 누워버립니다.

7월 16일 새벽 왜군의 기습으로 <원균> 등이 죽고 <배설>이 12척의 배만 가지고 도망간 통한의 칠천량대패가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원균>에게는 싸움의 시기를 선택할 재량도, 싸움에 유리한 장소를 선택할 권한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전술도 선택할 수 없었으니 <원균>의 파국은 당연했습니다.

명량대첩은 기적이기에 대단했지만 군주의 어리석음이 나라를 망칠 뻔 했습니다.

이후 <원균>에게 마음의 짐을 졌던 선조는 선무공신 1등 3인에 <이순신>, >권율>, <원균>을 뽑아주긴 합니다.

굳이 이를 적는 이유는 능력은 부족했지만 <원균>이 기녀를 끼고 술판 벌인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좌의정에 재기용된 <송강정철>은 가는 곳 마다 기녀를 끼고 술판을 벌였습니다.

문제는 그만이 아니라 많은 신료들이 그랬습니다.

명나라를 망하게한 최고 원흉으로 꼽는 <만력제 신종>이 이 전쟁이 조선이 불러들인 것으로 단언하고 임금과 신하의 무능과 무책임을 꾸짖었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요.

이후 명나라 조정에서 조선 조정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고 직할 통치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합니다만 다행히 당시의 <만력제>가 일을 너무 싫어하는 군주였기에 명의 지배를 받지는 않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지켜야 하는 가치인 '천하대의'가 천리와 천명을 받은 중국 황제에 대한 절의와 충성을 뜻했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즉 국가에 대한 애국심보다 '천리와 인성' '천하대의'와 같은 추상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앞세우고,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의무도 회피하는 것이 주자의 세계관이니, 결국 성리학이 나라를 망친 것입니다.

신료들은 전쟁 중에도 휴가원을 내어 도망간 노비들을 추쇄하는 데에만 온힘을 쏟습니다.

예학으로 이름났다는 <김장생>이 방납과 고리대로 백성을 수탈하여 말썽이 났고, 왕자와 부마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방에 머물며 직접 백성을 수탈합니다.

전란 중이라 급료를 지급하지 못하니 힘 있는 자들이 백성들을 수탈하기 위해 지방 수령을 자청합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정착을 기피했고 농구를 잡은사람이 없어 국가의 재정은 파탄나고 도적들이 우글거립니다.

당시 토지를 가진 사대부와 양반 사림이 주로 내는 전세(田稅)와 재산이 없는 백성들이 주로 내는 공납이 있었는데 田稅는 아주 적게 걷고 부족분을 백성들에게 뺐었습니다.

그러니 토지 조사를 제대로 할 리가 없고 공납제도가 개혁될 리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분과 질서를 지켜나가기 위해 예학을 강제했고 지방마다 향약을 만들어 흉포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굶주린 백성들은 사람을 죽여서 그 시체를 먹기까지하여 여자와 어린아이는 마음 놓고 나다니지도 못했고, 굶어 죽은 시체에도 살점이 남아있지 않았다 합니다.

보급이 좋아 잘 먹은 명나라 군사들이 술에 취해 토한 토사물을 따라다니던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먹겠다고 자주 싸웠다 합니다.

그럼에도 무사나 전쟁 중 군공을 세워 수령이 된 자들은 오로지 백성의 것들을 빼앗는 일을 일삼았고, 기민을 구제하려고 설치한 賑濟所는 양곡이 터무니없이 적었으나 그나마 하인배들의 부정으로 쓸모가 없었습니다.

명나라 군대의 약탈도 엄청났습니다.

남자들은 군대에 징집되어가서 죽고, 여자들은 왜군에게 또한 명군에게 몸을 더럽힙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 군림하던 임금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났고, 군자인양 허세를 부리던 지식인들의 초라한 모습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협상의 결렬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호남이 점령되자 도망 잘 가는 선조는 이번에는 진심어린 중신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중전과 세자부터 도망시킵니다.

다행히 왜군은 한양 점령이 목표가 아니라 자신들의 조선 영토 획득 의지를 명나라에 분명히 밝히고, 더 나아가 명의 방어 의지를 시험하고자 한양 압박으로 목표를 달성했다고 여깁니다.

즉 조선 분할 협상장으로 명을 끌어내려는 전략이어서 和戰 양면 작전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명을 제압할 정도의 국력이 아니었고, 일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조선의 의지도 강했고, 일본의 국내 사정이 모든 것을 걸 수 있을 만큼 중앙집권적이 아니어서 명과의 전투를 최대한 피합니다.

그런데 명량해전의 패배로 보급의 문제로 사정이 바뀌어서 다시 후퇴하여 울산성 전투를 벌이는 등 전투 상태를 유지하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노량해전 이후 종결됩니다.

이때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 <유성룡>에게 전쟁의 모든 책임을 지우고 파직시킵니다.

즉 전쟁의 모든 책임이 그에게 전가된 것인데, 당쟁도 그의 책임이었고, 조선이 자강지책을 세우지 않은 것도, 화의를 주장하여 목전의 안일만을 추구한 것도 모두 그의 죄였습니다.

희생양이었죠.

전란이 끝나자 선조는 공신을 분류하는데 호종공신(扈從功臣), 즉 자신의 몽진에 동행한 신하들과 적과 싸워 무찌른 宣武공신으로 나누는데 호종공신의 공이 더 크다고 규정합니다.

선조를 따라다니다 공신에 책봉된 조정대신들이 미안했던지 임금에게 존호를 올리는데 총 16자를 받습니다.

선조가 죽고는 총 38자를 올렸는데 세종대왕의 존호 14자보다 세 배 가량 됩니다.

전란 때 명나라 군대에 동행한 상인의 움직임을 본 <이덕형>, <유몽인> 등의 깨어있던 신하들이 통상과 무역의 활성화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를 주장하나 대부분의 사대부와 사림이 반대합니다.

상공업의 활성화가 부의 이동을 빠르게 하고, 이로 인해 신분 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하여 반대합니다.

그리하여 조선을 개혁할 기회를 팽개칩니다.

당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훨씬 부강함을 깨달았으나 나라야 알 바 아니고 신분질서가 고착되기만을 원한 것이죠.

그렇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유성룡에게 전란의 책임을 다 뒤집어 씌우고 끝납니다.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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