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콜라이 부하린은 누구인가
17세에 마르크시스트가 된 수재
좌파의 리더-사회주의건설 다뤄

<이병주>의 대하소설 중 하나인 지리산의 초반부에서 중요한 등장인물인 하동의 시니컬한 부호 <하선생>이 <부하린>의 재판을 언급하고, 재판 결과를 보고 전향한 사회주의자가 아주 많았다는 얘기를 합니다.

당시 <니콜라이 부하린>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한국 내에서 전혀 없어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김남국>교수가 대학원 시절에 낸 이 책이 나오자마자 읽었습니다.

초판이 나온 1993년 무렵의 저는 당연히 사상과 경제에 대한 심대한 지식을 접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전혀 없었지만 <부하린>의 진정성 만큼은 확실히 느꼈습니다.

최근 다시 읽고 당시엔 뭐가 뭔지 도통 몰랐었음을 확인하고 망연했습니다. 신문에 글을 연재하는 것이 나름 부담은 되지만 再讀을 하게하여 저를 발전시켜 줌을 실감합니다.

1888년에 태어나 17세에 마르크시스트가 된 이 수재는 1907년에 모스크바대학에 입학하고, 21세에 모스크바 전체 당 조직의 책임자가 되고 수 차례 투옥과 석방이 되다가 추방됩니다.

1912년에 <레닌>을 만나고 자녀가 없던 <레닌>에게 아들 또는 조카처럼 사랑받습니다.

혁명 성공 후 1917년 약관 29세에 당 중앙위원이 되고, 1919년에 8인의 정치국원에 선출됩니다.

1917~1921년까지의 4년 동안 <레닌> 등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가장 강경한 좌파노선 그룹의 리더가 됩니다.

그러나 백군과의 내전에 의한 전시 공산주의 정책에 대해 1921년에 각 지방에서 발생한 많은 농민들의 반란과 '크론슈타트 수병의 반란'을 겪고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부가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결국 노동자들이 전반적인 정열의 감소, 작업 능력의 저하, 부르조아 심성과 사적 이윤 동기가 결부된 노동 강도의 불가피한 퇴조가 왔다고 진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성숙된다고 본 자신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대가 틀렸음을 선언합니다. 봉착한 한계에 공감하여 조직되지 않은 소상품 생산자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이들에 대한 양보와 이 부문의 축적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로 나아갑니다.

<마르크스>의 영구 혁명론에서 우선 러시아만이라도 먼저 발전해야 한다는 일국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으로 변화합니다. 또한 필연적으로 수반될 위험이 있는 관료주의의 등장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신경제 정책'의 1920년대가 '유일한 올바른 길'이고 '전진'이라는 주장을 펴고, 양보에 따른 자본제적 생산 관계의 부활이 프롤레타리아가 장악한 국가 기구에 의해 극복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국가 기구들의 역할에 의해 소상품 생산자와 부농(클락) 역시 사회주의 경제안으로 포괄될 수 있다고 낙관합니다. 당시 <레닌>이 1925년이 사망하고 <부하린>은 논의의 전개를 신경제의 주창자라 할 수 있는 <레닌>의 권위에 크게 의존하긴 합니다.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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