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석유고 '김제향토사연구회'

원전 의미 살리고 문장 묘미 느껴져
17세기 조선 상황-지식인 고뇌 담겨

김제향토사연구회(회장 김병학)은 백석 유집의 문집 ‘백석유고’ 국역본을 출간했다.

백석 유집은 김제 수곡 출신으로 임진왜란과 호란의 난세를 겪으며 청빈한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 석계 최명용에게 수학했고, 후에 사계 김장생을 배알하고 ‘심정’과 ‘근사록’ 등을 익혔다.

1616년 생원시에 합격해 잠시 관직에 나갔으나 정국이 혼란스러워 사직했다.

정묘호란 때에는 사계 김장색의 막하에서 향호호소사가 돼 격문을 발해 창의하고 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국과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회향해 출입을 삼가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이후 의금부도사 등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자 효종은 사헌부지평을 증직했고, 유림들은 백석서원을 건립해 추모했다.

백석이 세상을 떠난 후 처음으로 문집을 구성한 것이 1779년이고 이후 전책이 수습돼 문집을 재편한 것이 1831년이다.

묘소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문집 서문은 송환기, 발문은 조인영이 지었다.

문집에는 149수의 시와 기와 설이 각각 4편, 편지 30여편, 약간의 제문과 상소문 그리고 후에 수습된 전책과 집책 33편이 전부다.

당시 학자들에 비하면 소박한 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당시 혼란한 정국에서 스스로 입언하려는 뜻이 없었고, 또 하나는 사후 문집 간행으로 인해 당하게 될 가난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평소 문집간행에 대해 후손들을 엄히 경계시켰다.

비록 문집의 양이 풍성하지 않지만 남겨진 시와 전책들을 보면 선생의 청빈한 삶과 올곧은 충정을 느낄 수 있다.

선생의 시에는 안빈과 우국의 상념이 교차하고 있다.

전책에는 요순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려는 신하의 충정이 깊게 배어 있다.

이번 국역본은 원문표점, 국역, 각주 체계로 이뤄져 있다.

국역은 원전의 의미를 최대한 살려 문장의 묘미를 느낄 수 있게 했으며, 난해한 어구와 용례는 총 1971개 각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백석유고는 17세기 조선의 긴박한 상황과 이에 따른 지식인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왜란과 호란으로 나라가 침탈을 당하는 상황에서 유학자들은 국권 수호와 사회 계도에 앞장서야 했고, 한편으로 끝없는 울분을 자기 수양으로 견뎌야 했다.

개인의 영달보다 나라를 위하는 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백석 선생은 17세기 전북 김제를 대표하는 도학자 뿐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다.

당시 김제 군수로 부임한 창강 조속은 백석 선생과 막역하게 교유하며 후에 백석서원에 배향됐고, 그 인연으로 후손 조인영은 백석유고 발문을 찬했다.

또 김제 출신으로 국필로 일컬어지는 송재 송일중, 임진왜란 때 활약한 안위 장군, 호란 때 활약한 조필달 장군과 관계 등 전북문화사 및 의병활동 등을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데 의의가 있다.

역자 이은혁은 전주대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원광대 서예과 석사, 성신여대 한문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대한민국서예대전 대상 및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한문과 서예를 병행해 전주대 객원교수, 한국전통문화대 강의전담교수,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조석창기자 

저작권자 © 전북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